[시선] 대리전과 위험의 외주화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2021. 5. 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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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인기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롤)의 초기 세계관을 짧게 정리하면 ‘대리전’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 속 분쟁은 전쟁 대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가상의 마법공간인 ‘소환사의 협곡’에 소환된 챔피언들의 대리전을 통해 이루어진다. 죽음과 파괴라는 페널티가 없는 매직 서클(마법진) 안의 분쟁은 분쟁의 주체인 이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는 것으로 설정되어 초창기 이 게임의 세계관을 지탱했다.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대리전을 통한 갈등의 분출과 해결은 대중문화에서 자주 나타난다. 포켓몬들 간의 대결로 갈등의 중심을 이동시킨 <포켓몬스터>, 대결장에 마법진을 쳐 현실과 분리시킨 <터닝메카드> 등이 대표적이다. 대결과 갈등이 주는 만족감을 유지하면서도 패배와 부상의 위험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대중문화는 매직 서클 안의 대리전을 활용해온 바 있다.

대리전 서사 진행의 전제는 위험의 외주화다. 부상·사망 같은 전투 결과는 대리전을 통해 사건 당사자에게 닿지 않는 것으로 변화한다. 패배는 개념적 패배일 뿐, 현실의 주인공에게 상처를 내지 않는다. 심리적 좌절감은 있을 수 있겠지만, 대리전이 아닌 방식의 대결이었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피해량을 감안하면 상당히 감소한 리스크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의 외주화는 결국 가상의 세계 안에서만 의미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피해가 쉽게 복구될 수 있는 가상의 마법진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전쟁을 막기 위해 소규모 군대만으로 대리전을 벌이자고 한다면 다들 코웃음을 칠 것이다. 누구에게 어떤 위험을 떠넘기건 누군가 죽고 다치는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매직 서클이 현실에 나타나지 않는 한, 이 방식은 영원히 텍스트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현실에선 불가능한 무언가라고 말하지만, 같은 맥락을 가진 다른 이야기에서 사회는 이를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위험의 외주화’는 실제로 많은 산업현장에서 벌어지는 외주, 하청, 용역의 문제다. 산출물과 이윤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과정에 따르는 피해는 산업의 주체로부터 분리된다. 현실 속 위험의 외주화는 게임과 달리 피해를 없애기보다 고스란히 외주화된 누군가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위험은 소멸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이관되고 중첩되며 사회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만들어내지만, 기업의 시각에선 자신의 피해가 아니므로 이를 소멸로 받아들이곤 하는 착시를 겪게 된다.

하청노동자가 철판에 깔려 스러져갈 때 119가 아닌 회사에 먼저 연락을 넣는 일은 위험과 책임이 외주화를 통해 사라졌다고 믿게 될 때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마법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으며, 어떤 외주화도 산업현장의 위험을 마법진처럼 소멸시킬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청업체에서 일어난 사고이니 우리 책임이 아니라는 기업의 목소리는 마법이 아닌, 눈속임으로서의 마술일 뿐이다. 게임 속과 같은 대리전이 가능하려면 산업현장의 위험을 줄여나갈 대책과 개선 방안을 마련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이윤과 책임을 분리시키지 못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실에서 이뤄야 할 것은 눈속임의 마술이 아닌 실제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마법진일 것이다.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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