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묵언]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1년과 정권 재창출

김택근 시인·작가 2021. 5. 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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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국민의정부는 역대 최약체였다. 자민련과 공동정부를 꾸렸고 의회권력은 여소야대였다. 그럼에도 대통령 김대중은 뛰어난 개인기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외환위기 극복,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금융·기업·공공·노사 등 4대 부문 개혁, 한류를 불러온 대중문화 개방, 정보기술(IT) 강국 건설, 전자정부 완성, 국민연금 등 4대보험 실시, 의약분업 실현, 4대강국과 선린의 외교망 구축, 국가인권위원회·여성부 출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김택근 시인·작가

그럼에도 업적 중에 간과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정권 재창출이다.

이는 정당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이다. 헌정사상 처음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국민의정부가 국격(國格)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진보진영이 불온한 세력이 아님을 증명해 보였고, 국민들로부터 다시 정권을 맡겨도 되겠다는 인증을 받은 것이다. 진보와 보수가 번갈아 집권하는 명실상부 양당제를 확보한 쾌거였다.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날 단골 목욕탕에 갔었다. 충청도 출신 주인이 신문을 치켜들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어쩌다 이런 일이…나라가 걱정이네.” 자신이 빨갱이로 믿고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참으로 큰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김대중은 준비한 대로 나라를 경영하며 그런 우려를 지워나갔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했던 집토끼들을 여당 후보에게 인계했다. 정권 재창출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권의 마지막 1년은 어땠는가. 시련의 연속이었다. 자민련과의 공동정권이 붕괴되었고, 수많은 권력형 비리가 터져 나왔다. ‘게이트 공화국’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들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검찰은 ‘지는 권력’을 짓이겼다. 죽음 앞에서도 지켜온 지조와 명예도 손을 탔다. 민심은 무섭게 돌아섰다.

이때 김대중이 선택한 길은 ‘민심에의 복종’이었다. 돌아선 민심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이나 사과했고 내용 또한 절절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저는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왔으며, 저를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마음의 상처를 드린 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심정으로 살아왔습니다. 제 평생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렇게 참담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이는 모두가 저의 부족함과 불찰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임기를 1년쯤 남긴 시점에서 개각을 단행했다. 장관급 9명을 교체하며 의원 겸직 장관들을 물러나게 했다. 검찰의 중립성을 훼손한다는 여론이 일자 민정수석실에 파견된 검사들을 돌려보냈다. 대통령 후보가 확정된 직후에는 당적마저 버렸다. 김대중은 자신이 이룬 치적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김대중도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돌아선 민심이 야속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신을 지웠다.

문재인 대통령도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임기 1년을 남긴 시점의 문재인 지지도는 김대중과 거의 같다. 김대중 33%, 문재인 34%(갤럽 조사). 앞으로 하루하루가 정권 창출의 중요한 순간들이다. 과연 성난 민심을 달래서 진보진영의 두 번째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 것인가.

우선 문재인 대통령은 스스로 치적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취임 4주년 연설과 회견은 실망스럽다. 지난 4·7 재·보궐 선거에서 표출된 민심과는 동떨어졌다. 실정에 대해서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행간에서 투정과 억울함이 묻어나왔다. 또 야당이 부적격이라며 지명 철회를 요구했던 장관후보자도 보란 듯이 임명했다.

요즘 청와대와 여당의 행태를 보면 참여정부 말기가 떠오른다. 대통령 지지율이 속절없이 떨어지는데도 지휘탑은 보이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정제되지 않는 말들만 무성했다. “이명박·박근혜가 집권해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위험한 발언들이 난무하고 있다.

김대중은 민심을 이렇게 판독했다. “국민이 언제나 현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가장 현명하다.” 민심은 재빠르지 않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을 내리친다. 그래서 민심은 천둥이 으르렁거리는 하늘이다. 인의 장막을 뚫고 민심을 따른다는 것은 비범한 일이다. 청와대가 고요해져야 한다. 그래야 성문 밖의 먼 북소리를 들을 수 있다.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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