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윈 "소련에 등 떠밀리면 안 돼" 중공군 6·25 참전 반대

2021. 5. 15.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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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대저택서 안락한 생활
명예직이지만 예우는 부총리급
중공 내정·외교 등 대놓고 비판
대우파로 몰려 직책 박탈당해
한반도서 귀국한 윈난군은 해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6〉
1956년 봄, 상하이에서 열린 사회주의 개조 승리를 기념하는 군중대회. [사진 김명호]
1950년 1월 18일 새벽, 전 윈난왕 룽윈(龍雲·용운)이 베이징에 첫발을 디뎠다. 정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마련한, 일본 점령 시절 만철(滿鐵) 총재가 살던 대저택에서 베이징 생활을 시작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시작으로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중공은 민주인사나 전 국민당 요원에 대한 원칙이 있었다. 안락한 생활은 보장하되 권력은 근처에도 못 오게 했다. 룽의 직책은 중공인민정부위원 겸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이었다. 명예직이었지만 룽은 개의치 않았다. 기관 사무국은 비서, 경호원, 운전기사, 요리사, 정원사 등을 파견했다.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월급도 지급했다.

룽윈은 생소한 생활에 만족했다. 부인 구잉치우(顧暎秋·고영추)가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중공 고위층의 네 아버지에 대한 예우가 기대 이상이다. 쿤밍(昆明)시절 보호받은 민주인사들의 발길도 끊긴 날이 없다.”

쿤밍서 보호받은 민주인사들 발길

룽윈(왼쪽 둘째)은 한동안 덩샤오핑(오른쪽 첫째)과 함께 서남군정위원회 부주석도 겸했다. 1950년 봄 충칭. [사진 김명호]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했다. 중공 상층부는 개입 여부를 놓고 고민했다. 격론이 벌어졌다. 매파는 명분을 중요시했다. “항미원조(抗美援朝)는 정의로운 반침략전쟁이다. 조선이 무너지면 우리도 영향을 피하기 힘들다. 좌시할 수 없다.” 비둘기파는 신중론을 폈다. “혁명정권 설립이 얼마 되지 않았다. 평화가 시급한 시점이다. 경솔하게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 이유가 없다.” 룽윈은 후자에 속했다. 신분이 중앙군사위원이다 보니 발언권이 있었다. “중국은 수십 년간 전화가 그치지 않았다.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것이 전쟁이다. 소련의 등에 떠밀려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것은 숙고(熟考)해야 한다. 전비(戰費)도 중국 몫이다. 지금 중국은 돈이 없다. 기댈 곳은 소련뿐이다. 소련은 믿을 만한 나라가 아니다. 동북을 해방시킨 후 소련군은 공장시설을 깡그리 들고 갔다. 이런 소련에게 전비(戰費) 충당을 위해 외채를 구걸해야 한다. 상환하려면 십수 년이 걸린다. 참전으로 중·미 관계가 얼어붙으면, 녹기까지 적어도 25년은 걸린다. 대만 문제는 더하다. 영원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

룽윈은 발언권만 있을 뿐, 결정권은 없었다. 중국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중공은 50군으로 개편된 전 윈난군 60군을 선봉에 세웠다. 용감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총과 대포로 미군과 수인사를 주고받은 50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 방어선까지 담당했다. 인명손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룽윈은 윈난 청년의 씨가 마르겠다며 통탄했다.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50군은 지원군 중 가장 많은 전투에 참가하고, 가장 많이 죽고, 가장 오랫동안 한반도에 주둔했다. 중공은 윈난인들이 한 부대에 몰려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귀국과 동시에 다른 부대에 분산시켰다. 50군이란 군호도 없애버렸다. 지휘관 쩡쩌셩(曾澤生·증택생)에겐 육군 중장 계급장을 달아줬다. 우대는 거기까지였다. 마오쩌둥에게 공산당에 입당하겠다고 청원했지만, 마오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너는 국민당원이었다. 당 밖에서 할 일이 많다.”

마오쩌둥의 내부모순 처리방안이 실린 신문을 구입하는 학생들, 1956년 6월 19일, 베이징 대학. [사진 김명호]
1957년 4월, 반우파운동이 벌어졌다. 룽윈은 소수민족 우파로 몰렸다. 이유는 1년 전에 마오쩌둥이 제창한 쌍백(백화제방, 백가쟁명)운동이었다. 마오는 대국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었다. 음모(陰謀)와 양모(陽謀)의 대가였다. 1956년 2월 14일, 소련공산당 20차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부정하는 비밀보고를 했다. 사회주의 진영이 혼란에 빠졌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줄을 이었다. 사회주의가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던 중국도 웅성거렸다. 가을에 접어들자 일이 터졌다. 일부지역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의결했다. 학생들도 수업 거부로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마오는지들끼리 쑥덕거리며 수습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외부모순이 아닌 내부모순이다. 불만이 있으면 하고 싶은 말 다 하라”며 언로를 열어줬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지식은 힘”이라는 서구의 명언만 맹신했다. 지식이 죄가 되는 시대도 있다는 것은 몰랐다. 쪼그라들었던 간덩이가 커졌다. 공산당 비판을 쏟아냈다. 룽윈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7년 5월 7일, 전인대 상무위원회 좌담회에서 대담한 발언을 했다. 중공의 내정과 교육, 외교의 문제점을 대놓고 비판했다. “적지 않은 인사들이 내정의 착오와 결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대부분이 하부에서 범한 일이지만, 근원은 최상층부의 무능 때문”이라며 호랑이 수염을 건드렸다. 교육문제도 비판했다. “베이징사범대학에 부속 중학이 있다고 들었다. 학생 전원이 고급간부 자녀들이다. 평범한 집안 학생들은 입학이 불가능하다. 이런 학교를 나온 학생들은 자신이 남보다 위에 있다는 특권 사상에 젖어있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군주국가에 귀족학교가 있다. 평민들은 입학할 엄두도 못 낸다. 사회주의 국가에 귀족학교가 웬 말인가.” 소수민족 정책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소수민족 지역의 한족 간부들은 소수민족 간부들의 직권을 존중하지 않는다. 당이 배양한 소수민족 간부들은 단련과 재교육받을 기회가 없다. 직책만 있고 권한이 없다 보니 소수민족 자치는 요원하다.” 소련 비난은 맹렬했다. 참석자들이 자리를 뜰 정도였다.

중공, 룽윈 사후 우파 명단서 삭제

쌍백운동은 반우파운동으로 이어졌다. 쌍백운동 시절 맘 놓고 주장을 편 지식인과 민주당파 인사들은 우파로 곤욕을 치렀다. 룽윈은 그냥 우파가 아닌 대(大)우파로 몰렸다. 모든 직책을 박탈당했다. 5년간 칩거하며 독서로 소일하다 복잡했던 삶을 마감했다. 중공은 룽윈의 전공(前功)까지 말살하지는 않았다. 황급히 우파 명단에서 지워버리고 성대한 영결식을 열었다.

룽윈은 평생 쉰 적이 없었다. 유람이나 휴식성 여행과도 거리가 멀었다. 복잡한 시대에 가장 복잡한 삶을 살았다. 지금도 윈난에 가서 룽윈 비난은 금물이다. 했다간 무슨 험한 꼴 당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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