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 심고 '로미오' 공작 전술..34년간 동독 '첩보 대장'

채인택 2021. 5. 1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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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지 산하 대외정찰총국 창설
기발한 기만·선전·선동 전술 개발
브란트 총리 개인 비서 귄터 기욤
장기간 침투시켜 고급정보 빼내
보안 철두철미 '얼굴 없는 남자'
냉전 시대 CIA·KGB도 혀 내둘러
78년 포착돼 서방 희롱 마침표

[세계를 흔든 스파이] 동독 해외정보국장 마르쿠스 볼프
마르쿠스 볼프가 1989년 동베를린 알렉산데르 광장의 시위대 앞에서 개혁 촉구 연설을 하고 있다. [독일연방문서보관소]
냉전 시대의 스파이 세계는 흔히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대결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실력파 조직이 따로 있었다. 동독(독일민주공화국·DDS·1949~90)의 국가보안부(MfS·약칭 슈타지) 산하 대외정찰총국(A총국·HVA)이다. 52년 대외정치정보국(APN)으로 시작해 55년 HVA로 개명한 이 조직은 서독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공산권의 정보·공작 칼날이었다.

마르쿠스 볼프(1923~2006)는 51년 비밀경찰인 슈타지에 들어가 이듬해 이 조직의 창설 요원이자 책임자가 됐다. 86년 은퇴할 때까지 34년 동안 HVA 국장으로서 ‘동독 스파이 대장’을 맡았다. 볼프가 이토록 오랫동안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단 하나, ‘실력’이었다.

볼프는 기발한 스파이 전술을 수없이 개발하고 실행했다. 자본주의 국가로 번성하는 서독을 무너뜨리기 위한 그의 공작은 집요했다. 서독 정계·경제계·문화계에 수많은 스파이를 심었다. 선호한 공작 전술의 하나가 ‘두더지’로 불린 장기 잠복 고정간첩 심기다. 그는 신입을 뽑으면 장기간 교육·훈련을 시켰고, 숙달된 요원들을 서독에 밀파해 장기 잠복시켜 각계에 뿌리를 내리게 했다. 고정간첩을 심어두고 꾸준히 경력을 쌓게 한 다음 고위직이 되면 ‘고급 정보’를 얻어내는 기법이다. 인내심을 갖고 장기 투자하는 볼프에게 서독 정보·보안기관인 헌법수호청은 번번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볼프의 ‘대표작’이 바로 귄터 기욤(1927~95)이다. 기욤은 59년 같은 요원인 부인과 외아들과 함께 서독에 귀순해 합법적인 지위를 얻었다. 가족 귀순을 의심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기욤은 서독 사회민주당에 침투해 프랑크푸르트 지부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성실성과 업무 처리 능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 결과 69~74년 독일 연방 총리실에 근무할 수 있었다. 마지막 2년은 빌리 브란트 총리의 개인 비서로 활동했다. 볼프가 서독 총리의 귓속에 도청장치를 설치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74년 당시 서독 수도인 본에서 체포된 기욤은 “나는 독일민주공화국 국가인민군의 장교다. 국가보안부 직원이기도 하다. 장교에 대한 경의를 표해주기 바란다”라고 당당하게 외쳐 서독 정가에 충격을 안겼다.

기욤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독 경제발전과 동독·동유럽과 화해로 상호 발전을 꾀한 브란트 총리의 ‘신동방정책’을 곁에서 목격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이념과 동독 체제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다. 13년 형을 받은 기욤은 81년 스파이 교환으로 동독에 귀환해 영웅이 됐다. 귀환 직후 15세 연하의 슈타지 간호사와 불륜에 빠져 공작 동지인 부인과 헤어지고 재혼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인성 문제가 있는 기욤이 작전은 빈틈없이 해낸 배경으로 철저한 스파이 교육을 꼽을 수 있다. 볼프는 ‘HVA 대학’으로 불리는 스파이 학교를 세우고 요원들을 몇 년에 걸쳐 교육했다.

볼프가 동원한 또 다른 공작 기법의 하나가 ‘로미오 방식’이다. 젊고 매력적인 남녀를 요원으로 선발해 성을 무기로 정보를 수집하게 했다. 피해자는 사랑인 줄 알고 상대를 만났다가 공작임을 알고 절망에 빠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인간적인 모습이다.

이런 볼프가 이끈 HVA는 다양한 정보 수집과 공작 능력에서 CIA와 KGB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능력을 보였다. 서독을 비롯한 서방의 모든 나토 동맹국을 능가했다는 평가다. 정보 수집은 물론 상대방 정보기관의 활동을 감시하고 이중 스파이를 파견하는 등의 방첩 활동에도 능했다.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리는 가짜정보 확산과 속이는 기만전술, 선전·선동은 기본이었다. 서방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사보타주와 불안정화 전술에도 강했다. 이는 소련 공산주의자들이 1920년대 개발한 ‘능동적 수단’을 진화시킨 공작 기법이다. 반핵·반부패·반기성세대 등 서방에서 벌어진 다양한 자생적 진보 운동에 몰래 개입해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볼프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서방을 희롱했다. 서방 정보기관은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정보기관의 기본인 철저한 보안 덕분이었다. 그는 ‘얼굴 없는 남자’로 불렸다.

그의 얼굴은 78년에야 비로소 서방에 알려졌다. 볼프는 78년 신분을 숨기고 스톡홀름을 방문했는데 스웨덴 정보기관(SÄPO)의 방첩부서가 누군지 모른 채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공유한 서독 해외정보기관 연방정보원(BND)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사진 속 인물이 볼프임을 확인했다. 동독에서 이중스파이로 활동하다 서독으로 온 망명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CIA가 59년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촬영했던 사진에서 청년 볼프를 찾아내면서 그의 과거 공작 이력도 드러났다. 그 뒤 볼프의 얼굴이 서독 시사잡지 슈테른의 표지를 장식하면서 ‘얼굴 없는 남자’라는 별명은 비로소 사라졌다.

HVA가 냉전 시절 최고의 비밀정보기관이라는 평가를 얻으면서 서독은 물론 전 유럽에 영향을 끼친 배경에는 이처럼 지독한 자기관리가 있었다. 볼프는 공산체제를 옹위한 인물이지만 이런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독일 통일 뒤 스파이 활동과 반역 행위로 재판을 받고 2년간 감옥에 들어갔다 석방됐다. 동독은 체제 경쟁에선 패배했지만, 해외 정보·공작 활동에선 평가를 유보할 수밖에 없다.

■ ‘아웃사이더’ 볼프, 29세에 동독 슈타지 부문장 맡아

「 마르쿠스 볼프는 1923년 독일 서남부 힝겐에서 ‘아웃사이더’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대인 의사로 공산당원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공산당 청소년 조직’에 가입시킬 정도로 신념이 강했다. 당시 독일에서 유대인이자 공산당원이라는 것은 위험한 조건이었다. 아웃사이더로 치부되는 것은 물론 언제든지 박해, 심지어 린치까지 당할 수 있었다. 실제로 독일공산당 전신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결성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은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봉기했다가 극우 퇴역 군인들에게 잡혀 고문당하고 살해돼 시내를 흐르는 슈프레 강에 던져졌다. 잔혹의 이념 대결 시대였다.

볼프의 어머니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모계 혈통을 기준으로 삼는 유대인 사회에선 유대인으로 치지 않았다. 나치는 유대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유대인으로 박해했다. 33년 반유대주의를 내건 나치가 집권하자 볼프의 가족은 즉시 가까운 프랑스로 떠났으며, 34년 공산주의 이념의 조국인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볼프 인생의 첫 전기였다.

그곳에서 러시아를 배우면서 불렸던 미샤라는 애칭은 평생 별명이 됐다. 16세 때인 39년 소련 국적도 얻었다. 모스크바 항공학교에 다니며 엔지니어의 길을 밟던 그는 41년 나치가 소련을 침공하자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옮겼다. 그곳에서 볼프는 인생의 두 번째 전기를 맞았다. 42년 국제공산당 기관인 코민테른에 들어가 제101 파괴공작학교에 다니며 스파이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코민테른은 전 세계의 부르주아를 타도하고 공산혁명을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됐다. 볼프는 이곳에서 무기를 다루고 정보수집과 공작을 하는 다양한 기법을 배웠다. 당시 철저한 교육과 현장 실습으로 스파이 교육을 받았던 그는 나중에 이를 동독에 적용했다. 볼프가 당시 독소전이 한창인 전선의 후방에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고 파괴공작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해 8월 그는 소련에서 독일 공산당에 입당했다.

43년 5월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으로 코민테른이 해산된 뒤 볼프는 독일어 선전방송인 ‘독일 인민’에 들어갔다. 세 번째 인생 전기였다. 유럽 전선에서 2차대전이 끝난 직후인 45년 6월 가명으로 소련군 점령지인 동베를린에 라디오 특파원으로 파견돼 위장 근무에 들어갔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취재하던 그는 동독이 건국되자 49년 11월 외교관으로 변신해 주소련 동독대사관의 일등참사관이 됐다.

네 번째 전기는 51년 8월에 찾아왔다. 경제학연구소(IPW)라는 위장 명칭을 붙인 동독 슈타지의 대외 정치첩보 부문(APN)에 들어갔다. 52년 12월 부문장을 맡았다. 불과 29세였지만 사상·교육·경력 모두에서 그를 대신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슈타지는 58년 대외정보를 담당하는 A총국(HVA)을 설립하고 볼프를 국장에 임명했다. 전체 슈타지에선 부국장이었다. 볼프는 정치와 승진에 무관심한 채 동독의 해외정보기관을 세계적 수준으로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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