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무수한 고통에 내 것을 더하지 않으며 살고 싶어요, 미자처럼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작가 2021. 5. 14.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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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시 각본집
이창동 지음
아를|324쪽|2만2000원

강석경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을 처음 뵙고 벌써 다섯 번째 봄이 지나고 있습니다. 인터뷰할 때 선생님이 아들 동준이를 잃고 나니 명절, 생일, 어버이날같이 무슨 날이 싫다고 하셨죠. 해가 갈수록 그 말뜻이 와닿습니다. 봄이 왜 잔인한가. 지천에 아름다운 것들은 생동하는데 같이 볼 사람이 부재하니까 잔인하고, 없는 가족의 빈자리가 커지는 ‘가정의달’이 있어서 사무치는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정이 무너졌죠. 평택항에서 스물세살 청년 이선호씨가 숨졌습니다. 300㎏이 넘는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서요.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현장을 목격하고 기절했다는 기사를 보곤 먹먹했습니다. 일하다 사람이 죽는 게 일상인 비참의 나라. 그런데도 화면으로 접할 땐 나와는 먼 일로 여겨지기만 합니다.

선생님. 혹시 영화 <시>를 보셨나요? 2004년에 밀양에서 일어난 10대 남자아이들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출발한 작품이에요. 영화 도입부에서 병원에 간 미자(윤정희 배우)가 TV로 뉴스를 보는 장면이 나와요. 화면에는 자식을 잃은 팔레스타인 어머니가 울부짖고 있고요. 여기에 대해 이창동 감독이 말해요.

“일상에서 그런 장면을 뉴스로 보면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 뒤 장면에서 병원을 나오던 미자가 딸을 잃고 정신을 놓은 채 울부짖는 한 여자의 모습을 볼 때도 딱하게는 여기면서도, 자신과 이렇다 할 관계는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였을 거예요. 하지만 내 발밑의 물이 연결되어 있듯이, 그게 미자와 결정적으로 관련이 있었던 거죠.”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동준이 이야기를 담은 책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북콘서트에 갔을 때 한 교사가 고민을 터놓았어요. 학부모들과 하는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읽었는데 어떤 분이 그러더랍니다. “우리 아이는 특성화고를 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라고요. 그 교사는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라며 이럴 때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 학부모의 말은 안전하지 못한 세상에 자식을 내보내기 두려운 마음에서 나온 일차적인 반응이겠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아이를 수학여행에 보내지 않겠다는 보호자들이 있었듯이요. 아마 이선호씨의 죽음을 보면서도 선착장에선 절대 일하면 안 되는구나, 결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을 쪼그라들게 만들고 삶의 시야를 자기로 축소시킨다는 점에서도 참 나쁜 사회입니다.

그날 북토크에서 저는 말했어요. 내 자식이 특성화고를 가지 않아서 현장실습은 안 하더라도 대학생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졸업하면 우린 노동자로 살아가야 한다. 적자생존으로 돌아가는 경쟁 시스템에선 멀쩡한 사람도 ‘늘 화가 난 사람’이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그런 문화에서 내 자식은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지만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동준이 어머니가 자식의 죽음을 걸고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도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지 말아야 내 아이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라고요.

그런 점에서 저는 가해자 측 이야기로 풀어간 영화 <시>에서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면이 있어요. 미자가 말해요.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뭐라고?” 손자 종욱이가 답하죠. “종욱이 입에 밥 들어가는 거.” 선생님도 그러셨죠. 동준이 밥해줄 때 최고로 행복했다고. 이렇게 새끼 기르는 평범한 마음을 가진 주인공이 시적인 행보를 택합니다. “설거지통” 같은 현실에 눈돌리지 않음으로써 삶이 시가 되죠.

선생님. 제가 어버이날 긴 하루 어땠는지 안부를 물었을 때 “원하지 않는 눈물 몇 방울 떨구고 내가 동준이 엄마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섰다” 하셨죠. “모두 다 힘들지 않고 잘 늙어가면 좋겠다”는 소망도 덧붙이셨어요. 말씀을 듣고 ‘미자’가 떠올랐어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어서 단어와 기억을 잃어가지만 “미자는 그녀에게 남은 기억을 절망감으로 채우지 않기로, 세상의 수많은 고통에 자신의 것을 더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인물이거든요.

저도 미자처럼 살 수 있을까요. 이젠 세상을 이롭게 하기보다 세상에 고통을 더하지 않는 게 훨씬 어렵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네요. 그래서 영화에서도 “시를 쓴 사람이 양미자씨밖에 없”는 것이겠죠. <시 각본집>을 아껴 읽고 나니 강석경 선생님이 시인으로 보여요. “우리는 남의 비극이나 고통이 아주 멀리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토록 가까이 있다!”(이창동)는 통렬한 진실을 이미 삶으로 받아낸 사람, 그 저미는 고통 끝에 “내 옆의 동료나 친구에게 같이 마음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늙어가자”는 시적인 말을 낳은 사람이니까요. 덕분에 시심 부푸는 봄밤이 깊어갑니다.

은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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