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남기고 싶은 글쓰기 대신
(시사저널=송혜진 숙명여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노년층 고객과의 소통과 교감을 위한 방법으로 '노년층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해 본다면 어떤 방향이 좋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글쓰기, 자녀나 젊은 세대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글로 써서 SNS에 공유하거나 책으로 출판한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긍정적인 피드백을 기다렸을 그에게 나는 '노인들 얘기 듣고 싶은 이들이 있을까요?' '책을 내고 싶은 사람은 많아도 읽는 사람은 없다던데, 출판을 해야 할까요?' '있던 것 다 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는 마인드를 갖게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더 좋지 않을까요?'라는 식의 냉소적인 되물음을 하고 말았다. 질문한 이는 예의 바르게 '그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했지만 다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묘하게도 그 질문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노년기' '떠나기 전에 남기고 싶은 말' '들어줄 이'들을 이어줄 어떤 연결 고리들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맴돌던 중, 오래전에 '뿌리 깊은 나무'에서 펴낸 《민중자서전》 시리즈가 생각났다.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 말로 풀어놓은 생애 이야기다. 자서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만, 사실은 당사자가 직접 글로 쓴 것이 아니다. 어떤 이야기가 들은 이에 의해 정리된 특이한 자서전이다. 출판사에서 '이름 없는 민중이 입으로 쓴 자서전'이라 소개한 일종의 '생애 구술사'인 셈이다.
구술자의 말버릇이며, 사투리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쓰고, 한 번 말한 것을 다듬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정리된 것이라 단번에 읽히지는 않지만, 다른 자서전과 비교되지 않는 생생한 삶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시리즈 스무 권 중에는 진도의 강강술래 앞소리꾼 최소심,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다'는 자부심으로 한평생 살았던 명고수 김명환, '물은 건너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한다는 말'로 힘겨웠던 예인의 삶을 견뎌낸 가야금 명인 함동정월의 이야기가 있다. 그 어떤 학술 성과보다 귀중한 예술사의 장면을 담고 있어 소중히 여기는 나의 애장서다. 이 책들을 다시 펼쳐 보면 '이런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묻고, 듣고, 기록할 만하지 않은가?' '아니 기록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어느 교수님이 정년퇴임 기념으로 펴낸 책 한 권을 받았다. 영문학과 교수로, 지역 문화 활동가로 많은 일을 해 왔고 특히 음악을 좋아해 주변에 '음악편지'를 배달해 온 애호가로서 기획한 《우리가 하려고 했던 그 거창한 일들》(이종민 엮음, 걷는 사람들 펴냄)이다. 그 교수님은 '은퇴하게 된 내 이야기 들어 달라'는 책 대신, 주변 사람들에게 '네 인생의 음악이 무어냐' 묻고, 글 쓸 기회를 공유하는 통 큰 기획을 하셨다. 200명에게 직접 담근 매실청, 매실주를 고료로 걸고 청탁해 114명의 글을 받아냈는데, 읽어보니 구구절절,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음악을 꼽고 사연과 생각을 담아낸 글에는 같은 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이야기들이 살아 있어 정겨웠다.
무엇보다 이 책이 좋았던 점은 '나 여기 있소' '나 이런 사람이오'라는 글로 이웃 사람들을 독자로만 대하는 대신,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함께 말할 기회를 공유했다는 거다. 제대로 홀로 설 수 있어야 제대로 함께할 수 있다는 평소 철학을 이런 식으로 실천하신 지혜로움이 부러웠다.
노년기의 글쓰기, 말하기, 들어주기는 이런 식이면 좋겠다 싶다. 《민중자서전》처럼 잘 물어봐주고, 잘 들어주고, 들은 대로 글 써주는 방식, 이 교수님이 엮어낸 책처럼 '내 말 좀 들어봐라'는 식의 글쓰기나 출판보다, 너는 어떠냐고 물어봐줘 글을 쓰게 되는 '함께 하기' 방식 같은 것 말이다. 내 얘기 남겨놓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묻고, 들은 얘기를 있는 그대로 정리하는 글쓰기를 좀 서둘러 시작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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