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 또는 '화이트칼라' 주인공들..그들 말고도 사람이 있다 [이진송의 아니 근데]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2021. 5. 1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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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화'되는 노동은 미디어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경향신문]

최근 온라인에서 대학생들이 교내 노동자들의 시위가 학습권을 침해한다고 항의하거나, 대자보를 찢는다는 내용 등이 화제였다. 그 멸시와 적의는 어디서 오는 걸까? 노동에 급을 매기고, 자신이 그런 ‘노가다’를 할 리 없다는 굳건한 믿음은 손쉽게 구분 짓기와 타자화로 이어진다. 드라마 속 20대의 연애는 모두 대학생의 캠퍼스 러브스토리고, 전문직이나 ‘화이트칼라’만이 주인공이듯. 권리 투쟁 역시 ‘나’의 편리를 침해하는 ‘유난’ 정도로 축소하며 파업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5월의 첫날인 노동절은 지나갔지만, 우리의 노동은 계속된다. 오늘은 ‘주변화’되는 노동과 미디어의 재현 양상을 살펴본다.

정세랑 소설 원작의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넷플릭스, 2020)에서 은영의 유일한 친구였던 강선이 불쑥, 죽은 채 나타난다. 강선은 일터에서 추락한 낡은 크레인에 깔려 목숨을 잃은 산재 사망자이다. 강선은 쓸쓸하게 중얼거린다. “비쌌던 거지,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러니까 낡은 크레인을 썼던 거겠지.” 지난 4월22일 평택항에서 개방형 컨테이너에 깔려 숨진 이선호씨도 마찬가지다. 사고의 원인이었던 안전관리 소홀, 구조 신고보다 보고가 우선이었던 사후의 현장, 의대생 한 명의 개인적인 죽음보다 저조한 관심 등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목숨’보다 우선시하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정세랑 소설 원작의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에는 은영의 유일한 친구이자, 일터에서 추락한 낡은 크레인에 깔려 목숨을 잃은 산재 사망자 강선이 등장한다.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 화면 캡처

산재는 구의역 정비 노동자 사망 사건의 ‘컵라면’이나 평택항의 ‘300㎏ 철판’처럼 자극적인 ‘키워드’가 있을 때만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마저 개인의 불운이나 청춘의 ‘비극’ 같은 신파로 해석되기 일쑤다. 그러나 고용노동부가 4월 발표한 ‘2020년 산업재해 사고 사망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산재 사고 사망자는 882명. 한국 산재의 특수성은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게 추락, 끼임, 부딪힘 같은 단순 사고성 산재가 많다. 이는 안전난간을 설치하거나 보호장치를 사용하는 등의 조치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고다.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비싸지 않지만, 사고는 반복된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와 이중 노동시장 때문이다. 위험은 하청업체와 영세사업자 노동자에게 전가되고 책임은 증발한다.

SBS 드라마 <닥터탐정>(2019)은 실제로 발생한 산재 사건을 드라마에 활용하며 ‘신종 메디컬 수사물’을 표방했다. 주인공들은 산재 문제의 실체를 밝히고자 고군분투하고, 장르는 추리물과 수사물을 오간다. 동시에 산재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 기업과 정부 기관의 유착으로 방지할 수 있었던 산재가 지속해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도 조명했다.

실제 발생한 산재 사건을 다룬 SBS 드라마 <닥터탐정>의 한 장면. 배우 곽동연은 지하철 스크린도어 수리 일을 하면서 TL메트로 정직원을 꿈꾸는 청년 정하랑을 연기했다. SBS 제공

육체노동과 산재가 전통적으로 남성의 노동 문제로 여겨졌다면,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전면에 부상한 ‘돌봄 노동’과 ‘재생산 노동’은 오랫동안 여성의 영역이었다. 여기에는 코로나19 환자를 돌본 간호사,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뿐만 아니라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가사노동과 어린이 돌봄 노동을 부담하는 노동자(가족일지라도)가 모두 포함된다. 가사노동은 물론, 아이부터 노인까지 우리는 모두 돌봄 노동이 필요한 존재다. 그런데 이런 노동은 가정 내 어머니-딸-할머니-며느리 같은 여성 가족 역할과 유사하고, 실제로도 많이 겹치기에 노동으로 인식되기 어렵다. 가족의 의무라고 생각하거나, 친밀감과 정서적 교류를 임금노동으로 치환하는 데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심혜정 감독의 영화 <욕창>(A Bedsore, 2020)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길순(전국향)을 돌보며 집안일까지 도맡는 중국동포(조선족) 요양보호사 수옥(강애심)이 등장한다. 길순의 남편 창식(김종구)은 퇴직 공무원인데, 그의 안정적인 일상은 돌봄 노동을 관리하고 신경 쓰느라 바쁜 여성 가족과 대비된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우리 사회가 돌봄 노동을 가족에게 떠넘기는 현실과, 여성 가족을 착취하여 얻은 평화를 폭로하는 장면이다. 수옥은 낮은 임금과 창식의 구애(를 빙자한 폭력)에 시달리는데, 11년 전의 영화 <시>(2010)에서 미자(윤정희)도 같은 고충을 겪었다. 고질적인 문제라는 뜻이다.

수옥은 불법체류자이기에 이중적인 사각지대에 있다. 비자를 받기 위해 결혼하는 조선족 여성은 <파이란>(2001), <댄서의 순정>(2005)의 계보처럼 로맨스의 대상으로 낭만화되거나, <미씽>(2016), <뷰티풀 데이즈>(2018)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범죄자로 그려진다. 조선족 남성은… 말을 말자. 뿌리 깊은 외국인 혐오는 조선족만을 향하지 않으며, 부당한 대우와 착취로 이어진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 인권을 논하면 자국민부터 챙기라느니, 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느니 하는 혐오 발언이 만선이다. K팝 그룹의 외국인 멤버에게도 가혹한 잣대를 들이민다.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어느 날 갑자기 정말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다 돌아가 버린다면, ‘나’가 지금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생활은 다 무너질 것이다. 80만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는 내가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동시에 나의 공급을 소비한다. 노동의 씨줄과 날줄은 상상보다 더 촘촘하게 인간들을 엮는다. 외국인이라면 마땅히 자국민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일수록, 한인 인종차별은 잎새에 이는 바람보다 크게 느낄걸. 외국인 노동자는 나와 무관한, 내 몫을 빼앗는 이방인이 아니다. 인권이나 노동 처우 개선은 의자 뺏기 게임이 아니라 다 같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간다.

“비쌌던 거지, 사람보다 크레인이”
‘보건교사…’ 속 산재 사망자 독백
우리 사회의 뼈아픈 현실 드러내
영화 ‘욕창’에서 다룬 돌봄 노동
조선족 여성 요양보호사 주인공
외국인 혐오까지 ‘이중 굴레’에
때론 미화되고 때론 은폐되는
미디어 속 다양한 노동의 모습
이를 고찰하는 게 우리의 과제

디지털 노동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탄생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다. 시간을 쪼개 일한다는 점에서(예를 들면 ‘N잡러’) 파편화된 노동이기도 하다. 이 중 플랫폼노동은 쉽게 말해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일하는 사람이다. 배달 라이더나 청소 앱 노동자가 대표적이다. 임태운의 단편소설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황금가지, 2018)에서는 초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이 ‘히어로콜’이라는 앱을 통해 출동한다. 주인공 ‘마포구 리얼맨’은 슈퍼 히어로지만 별점이 떨어지면 마음을 졸인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서울지역 취업자의 약 9.3%인 46만1000명이 플랫폼에서 일감을 구한다. 대부분 표준계약도 없고, 사회보험 가입 문제가 있다. 교육훈련에서 배제되고, 업무 중 사고를 당해도 산재 처리를 받기 어렵다. 마포구 리얼맨처럼 별점 같은 불특정 다수의 평가가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점 역시 고용 불안정을 부채질한다. 지금의 노동법은 한 사업장(사업주)에만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을 ‘노동자’로 가정해 만들어졌다. 변화된 노동시장의 특성을 기존 노동법이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유튜버 크리에이터나 리뷰 블로거처럼, ‘사용자 데이터 생성’ 노동도 있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 1순위.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다 보니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거나,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일과 생활을 분리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노동과 피드백이 수익으로 전환되는 지점에 도달하기까지의 기준이 모호하다. 콘텐츠 소비 속도가 굉장히 빠르므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 더 자극적인 것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도태되기 때문에 비윤리적인 콘텐츠를 만들거나 번아웃이 오기 쉽다. 다수에게 자신을 보호장치 없이 드러내느라 댓글이나 사이버 폭력에 노출되고, 이는 실질적인 피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tvN 단막극 ‘드라마 스테이지 2021’ 시리즈 중 <관종>에서 금수저인 척 거짓말로 유명해진 인플루언서 하나(안소희)는 살인범에게 납치된다. 살인범을 고용한 것은 인플루언서 저격 유튜버 성필(송덕호). <관종>의 인물들은 돈보다 ‘관심’이 행동 동기지만, 데이터 생성 노동에서 ‘좋아요’와 ‘조회 수’는 결국 이익으로 직결된다.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를 심상정 의원이 연기 노동자로 칭해 논란이 일었다. 일부가 노동자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일하면서 살아간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노동은 특별히 신성하거나 천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가려면 누구나 하는 일이다. 미디어가 어떤 노동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어떤 재현은 왜 기울어지고 마는지, 무엇을 삭제하고 은폐하고 왜곡하고 일그러뜨리는지, 어떤 것을 낭만화하고 미화하는지… 지면을 얻어 떠드는 것은 나의 노동이지만, 감상하고 문제의식을 갈고닦으며 자신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윤리적 과제이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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