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인재 뽑지 않으면 영재학교 존재 가치 없다"

조승한 기자 2021. 5. 1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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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배 한국과학영재학교 신임 교장. 부산=조승한 기자 shinjsh@donga.com

“이곳에 오자마자 처음 한 이야기가 ‘한국과학영재학교가 8개 영재학교 중 하나면 살아남을 수 없다’입니다. 다른 곳과 같다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유일한 KAIST 부설 영재학교일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학생을 뽑지 않으면 학교의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지난달 23일 부산 부산진구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만난 최종배 한국과학영재학교 신임 교장은 “지금까지 선행으로 만들어진 똘똘한 학생을 뽑았다면 이제는 과학 분야별로 소위 ‘미친’ 학생을 뽑는 게 목표”라며 “입시발표회에서도 선행으로 만들어진 학생은 오지 말라, 서울대 가고 싶으면 오지 말라고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 교장은 지난달 6일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10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다른 영재학교와 과학고가 교육부 산하인 것과 달리 한국과학영재학교는 유일한 과기부 산하 영재학교다.

● 과학 특정 분야에 ‘미친’ 인재 뽑을 것...영재학교 본연의 가치 추구

최 교장은 '미친'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목표는 영재학교의 기본과 맞닿아있다고 강조했다. 영재학교와 과학고는 이공계 분야 인재를 양성하자는 목표로 설립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단순히 성적만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가 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졸업생 중 상당수가 이공계가 아닌 분야로 진출하거나 의약학 계열 대학에 진학하는 등 학교 설립 취지를 훼손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영재학교 출신으로 스펙을 자랑하는 의대생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논란은 점차 심화됐다.

영재학교들도 이같은 문제에 공감하고 있다. 한국과학영재학교를 포함한 8개 영재학교가 지난달 29일 의약학 계열 진학 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신입생 모집 요강에 담기로 하고 5월 발표한 요강에서 이를 실제로 반영했다. 장학금 환수와 일반고 전출 권고, 정규수업 외 기숙사·독서실 이용 제한 등이다. 국회에서도 교육위원회 소속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등 의원 10명이 영재학교와 과학고 졸업 학생의 의대와 한의대, 치대, 약대 진학을 금지하는 '고등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이공계 인재를 육성한다는 원칙에는 동의하면서도 학교별 속내는 복잡하다. 한국에는 8개 영재학교와 20개 과학고가 있다. 각 학교가 경쟁을 벌이면서 인재를 확보해야 하는 터라 의대 진학률을 은근히 활용하기도 한다. 최 교장은 "영재학교와 과학고들이 대부분 기본 운영 원칙에는 동의하는 편이다"면서도 "몇몇 학교들은 학교의 이름값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는 시각도 존재하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일각에서는 의약학 분야에서도 연구가 이뤄지는 만큼 학생의 생명과학 분야 진출을 막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학생들이 아직 새로운 진로 탐색을 할 수 있는 나이인 만큼 개인의 직업 선택권을 과도하게 막는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 최 교장은 의약학 계열에 진출하고 싶은 우수한 학생이라면 일반고에서도 충분히 진학이 가능하다는 의견이다. 영재학교는 이공계 분야에 필요한 영재를 뽑는 본연의 원칙에 집중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의대에 진학할 학생은 굳이 영재고나 과학고에 오지 않아도 충분히 일반고에서 성적을 내서 갈 수 있다"며 "한국과학영재학교는 입학 시 의약학 계열에 진학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졸업할 때는 추천서 자체를 써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일한 과기정통부 산하로 다른 영재학교에 비해 자유도가 높은 만큼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어 이공계 인재를 길러내는 모범 사례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최 교장은 “왜 지금의 한국과학영재학교가 만들어 졌는지 고민해봐야 한다”며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과학영재학교는 2003년 부산과학고에서 한국의 첫 영재학교로 전환하며 탄생했다. 이후 2009년 KAIST 부설로 거듭났고 국가 차원의 선도적 과학영재를 양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최 교장은 “영재학교가 영재학교답게 운영되도록 하기 위해 드라이브를 강력하게 걸 것”이라며 “운신의 폭이 가장 넓은 한국과학영재학교를 많이 바꿔 그야말로 미친 아이들이 들어와 꿈을 꿀 수 있다면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최종배 교장은 취임 일성으로 '한국과학영재학교와 다른 영재학교의 차별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과학영재학교 제공

● 1, 2단계 전형서 영재 확인되면 바로 선발...파격적 입시 요강 도입

최 교장은 부임과 동시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기간을 보냈다. 영재학교에서 4월은 5월부터 공개되는 신입생 전형 요강을 만드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바쁜 때다. 전국 영재학교와 과학고는 5월 1일부터 각자의 전형 요강을 발표하고 6월 초까지 신입생을 모집한다. 전형 요강은 각 학교가 바라는 영재 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영재학교와 과학고에 관심이 큰 학생과 학부모들의 관심이 뜨겁다.

최 교장의 첫 작품인 2022년 전형 요강은 '미친' 영재를 뽑는 그의 계획이 담겼다. 가장 크게 바꾼 부분은 전형 중간 언제라도 ‘특별한 학생’이 확인되면 바로 합격시키는 것이다. 기존 전형에서는 서류와 시험, 캠프를 통한 다면평가 3단계를 모두 거쳐 합격한 학생이 최종 입학자로 선발됐다. 2022년 전형에서는 1단계와 2단계에서도 특별한 학생이라고 판단되는 학생이 확인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고 그 즉시 뽑을 수 있다는 새로운 조항을 추가했다.

이러한 방식을 택한 이유는 3단계를 모두 통과한 학생을 뽑는 방식이 선행학습으로 모든 것을 잘하는 학생에게만 유리한 구조라고 봤기 때문이다. 1단계와 2단계, 3단계를 모두 잘하는 학생을 뽑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를 모두 선행으로 준비한 학생들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최 교장은 “서류전형을 보고 미친 학생이 있으면 즉시 뽑고, 시험문제를 냈는데 어느 분야에 미쳐 있다고 판단되면 그런 학생도 바로 뽑을 것”이라며 “그래야 미친 학생을 뽑는 새로운 룰이 생긴다”고 말했다.

답이 정해져 있는 과학 분야 어려운 문제를 풀게 하고 성적을 매겨 학생을 점수에 따라 선출하는 기존 평가방식도 뜯어고친다는 계획이다. 답이 있는 문제 대신 답이 정해지지 않은 문제를 내 정답을 찾아내는 선행학습에 익숙한 이들을 걸러내겠다는 계획이다. 최 교장은 "답이 있는 문제를 내 놓으면 아무리 특이한 답을 내도 결국 답이 맞냐 안맞냐에 초점이 쏠린다"며 "이번엔 절대 답이 없는 문제를 내 어떤 지식으로 접근하는가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과학영재학교가 1일 공개한 2022년 전형 요강의 일부다. '각 전형단계에서 특별한 능력과 잠재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자를 선발할 수 있음'이라는 조항이 추가됐다. 한국과학영재학교 전형요강 캡처

제도와 평가방식을 바꿨지만 한 분야에 특출난 학생을 뽑는 것은 결국 평가자의 몫이다. 학생을 선발하는 교사의 입장에서도 생소한 도전이라 이런 학생을 가려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학교 내부에서도 나온다. 최 교장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별도 외부 전문가 평가단을 갖추겠다고 밝혔다. 최 교장은 "외부에서 영재 전문가나 과목별 전문가가 오면 내부에서 못 보는걸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내부 트랙과 병행해 함께 평가하는 형태로 만들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면서 점차 한국과학영재학교만의 방향성을 제시하겠다는 게 최 교장의 목표다. 한국과학영재학교는 2003년 부산과학고에서 영재학교로 처음 바뀌었다. 처음 설립될 당시만 해도 거의 100%가 KAIST를 택했으나 지금은 졸업생 중 60%가 KAIST를 택한다. 나머지 40% 중 상당수는 서울대 등 다른 종합대학으로 진학하고 있다. 이 비율을 다시 높이겠다는 게 최 교장의 복안이다. 최 교장은 “선행으로 만들어진 학생을 당장 모두 거를 순 없어 점차 ‘괴짜’의 비중을 넓히는 게 순차적 목표”라고 말했다.

새로운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현장에서도 나온다고 했다. 그는 “연구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일반고와 과학고, 영재고를 같이 연구시켜 보면 처음에는 과학고나 영재고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잘한다더라”며 “그러나 연구를 점차 시켜보면 점점 일반고 출신이 더 낫다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그는 “현재의 과학고나 영재고의 교육이 틀에 박혀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교육이 틀에 박혀있다면 잠재력이 높은 학생을 뽑아도 기존 교육 때문에 자칫 재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우려가 생긴다. 최 교장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 주요 목표는 KAIST 영재교육원과 새로운 교육 틀을 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함께 어떤 교육을 하면 좋을지를 연구하고 정책연구를 거쳐 교사를 어떻게 가르칠지와 평가를 어떻게 할지도 올해 내로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최 교장은 기존 교육의 틀을 깨는 첫 단추로 평가 방법 전환을 들었다. 꼭 배워야 할 기초 필수 과목에 대해서는 특정 점수 이상이면 통과시키는 '패스(Pass)/페일(Fail)' 방식으로 평가한다는 복안이다. 최 교장은 “점수로 다 평가하면 괴짜를 뽑아도 선행학습을 한 똘똘한 학생 밑에 다 깔려버린다는 문제가 있다”며 “기본 필수는 패스제도로 가고 전문 심화 과목은 점수를 매겨서 줄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고나 영재고에서 이뤄지고 있는 학생 연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이 또한 선행학습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최 교장은 “대학교가 아닌 고등학교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며 논문 쓰듯이 연구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연구는 최소한의 원리와 방법을 알려주고 독창적으로 연결해 보는 정도로 끝내는 게 맞다”고 말했다.

최종배 교장은 "6년전부터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일이라 기쁘고 추진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부산=조승한 동아사이언스 기자 shinjsh@donga.com

최 교장은 1985년 과학기술처 사무관으로 공직을 시작한 공직자 출신이다. 광운대 전자공학과 학사, KAIST 핵공학 석사,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전기및컴퓨터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교육과학기술부 전략기술개발관, 청와대 대통령실 과학기술비서관, 국립중앙과학관장, 미래창조과학부 창조경제조정관과 과학기술전략본부장, 원자력안전위원회 사무처장 등을 지냈다. 교장 부임 전에는 기초과학연구원(IBS) 상임감사를 지냈다.

최 교장은 IBS 감사 임기가 4개월여 남았음에도 한국과학영재학교 교장직 공모에 도전했다. 그는 과거 교육과학기술부 과학인재정책과장으로 일하면서 교장에 대한 관심을 처음 가졌다. 이후 2015년 과학기술전략본부장일 때 한국과학영재학교 사이언스페어 축전을 위해 방문하면서 한국과학영재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고 싶다는 꿈을 오래 꿔 왔다고 말했다. 최 교장은 “한국과학영재학교는 교사자격증 없이 과학행정을 한 사람이 올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라고 말했다.

부임 한 달간 교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업무 협의를 했다는 최 교장은 교원과 직원 간 화합도 시급한 현안으로 보인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교사가 일반업무도 담당하는 일반고와 달리 한국과학영재학교는 교사를 수업과 담임, 연구만 담당하도록 분리했다. 최 교장은 “처음 설계는 좋았는데 점차 서로에 대한 괴리가 좀 생긴 것 같다”며 “하나하나 해결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최 교장은 "6년 전부터 꼭 해야겠다고 생각한 일을 이루게 돼 기쁘고 흥분되면서도 한편으로 잘 할까 하는 부담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천한 경험이지만 많은 경험을 했다면 했을 수도 있다"며 "후배들을 기르고 경험을 전해주는 조그만 소망을 이뤄 기쁘다"고 말했다.

[조승한 기자 shinj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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