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이기는 것은 논리 아닌 접촉이다

안선희 2021. 5. 14.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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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접촉이 편견 없애고 공감 이끌어내
같은 사람만 만나는 사회..제도화된 접촉 필요

혐오 없는 삶: 나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바스티안 베르브너 지음, 이승희 옮김/판미동·1만7000원

혐오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난민문제를 둘러싸고 유럽은 두 쪽으로 갈라졌다. 영국에서는 브렉시트를 놓고, 미국에서는 트럼프 지지를 놓고 찬반 진영이 강경하게 맞섰다. 정치적 반대는 혐오로까지 번진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는 유럽과 미국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혐오 없는 삶>의 지은이인 독일 저널리스트 바스티안 베르브너(주간지 <디 차이트> 편집장)는 “온건주의자, 합리주의자, 균형주의자의 목소리가 힘을 잃고, 새된 소리로 외치는 자, 혐오주의자, 급진주의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묘한 차이들은 양자택일과 아군과 적군의 구별 속에 묻혀 버린다”고 현실을 진단한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적대하는 사람들간의 ‘접촉’이다. “어떤 사람을 진짜 알게 되면, 더는 그를 증오하지 못한다.” 얼핏 너무 소박해보이기도 하는 이 명제를 입증하기 위해 지은이는 혐오를 극복하고 ‘친구’가 된 이들을 찾아나선다. 독일 함부르크의 연립주택단지, 덴마크의 경찰서, 제2차 세계대전 전장, 나미비아의 사막, 아일랜드 시민의회에서 난민과 난민 혐오자, 이슬람 소년과 경찰, 독일 전쟁포로와 미군, 네오나치와 좌파 펑크, 동성애자와 동성애 반대론자를 만난다.

함부르크 연립주택 1층에 살고 있는 연금생활자 부부 하랄트·크리스타 헤르메스 부부의 경험은 ‘접촉이 어떻게 혐오를 이기는지’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부부는 난민들에게 적대적이었다. 어느날 세르비아 출신의 난민 부부와 네 명의 아이가 2층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사 온 다음날 갑자기 베란다에서 물이 떨어지자 크리스타는 윗층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베란다에 걸려 있는 빨래, 세탁기도 건조기도 빨래 건조대도 없는 욕실을 발견한다. 크리스타는 어릴 적 손빨래를 해봤기 때문에 손빨래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난민 가족에게는 식기도, 이불도, 베개도,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부부는 그들에게 이불, 베개, 냄비, 프라이팬, 전기포트를 가져다주었다. 젊은 남자의 직업이 하랄트와 같은 자동차 정비사라는 것도 알게 됐다. ‘잠재적 사기꾼이자 싸움꾼’이었을 새 이웃은 ‘열심히 일하는 기능공, 가족을 돌보는 가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몇 주 만에 ‘집시들’은 ‘사람들’이 되었다.”

1950년대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여러 연구와 실험을 통해 일찌감치 이런 사실을 파악하고 ‘접촉가설’이라고 이름 붙였다. “적대자들 사이의 접촉은 편견을 줄여 주고, 더 평화로운 관계로 이끈다”는 이 가정은 이후 이론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의외로 우리와 다른 의견이나 배경을 가진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다. 함께 사는 가족, 점심을 먹는 동료들, 저녁에 가끔 만나는 친구들…. 이들은 우리와 비슷한 직업과 수입, 정치적 의견 등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최근엔 뉴스, 음악, 광고도 알고리즘에 따라 내 취향에 맞는 맞춤형이 제공된다. 그래서 선거일 개표 방송을 보다보면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지?’ “이렇게 세분화된 사회에서는 많은 집단들 사이에, 빈자와 부자 사이에,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 이민자와 정주민 사이에 종종 거리와 침묵이 지배한다. 편견을 배양하기에 이상적인 토양이 생성된다.”

극우·반난민 성향의 독일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 지지자들이 지난 2018년 5월27일,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깃발을 흔들고 있다. 베를린/AP 연합뉴스

지은이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헤르메스 부부가 경험했던 ‘마법 같은 순간’을 제도화하고 의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2013년 아일랜드에서 진행된 시민의회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시민의회는 동성부부 합법화 여부를 비롯해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기구였다. 연령, 소득 수준, 거주지 등을 감안해 골고루 시민 66명을 뽑았다. 이중 한 명으로 선정된 우편배달부 핀바르 오브라이언은 ‘아일랜드 버전의 분노한 백인 중년 남성’이었다. 동성애 반대론자이기도 했다. 같은 조가 된 크리스 라이언스는 매번 새로운 색깔의 머리를 하고 오는 남성 동성애자였다. 어느날 토론 중에 크리스는 “나는 이런 자리에 맞지 않는 것 같다. 무엇보다 겁이 난다”고 말했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핀바르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크리스와 똑같이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 순간이었다. 이들은 대화를 지속했고, 핀바르는 계속해서 놀랐다. 크리스가 너무 평범했기 때문이다. 핀바르는 동성부부 합법화를 위한 헌법 개정에 찬성표를 던졌다. 핀바르와 크리스 이야기는 ‘제도화된 접촉의 힘’을 보여준다. “증오와 싸우고 사회 분열을 극복하고 싶은 정부는 적들, 반대자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의 만남을 과제로 삼아야 한다. 인간이 전혀 다를 수 없음을 깨달으며, 타인을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아일랜드 시민의회 사례가 언론에 소개되자 독일에서도 유사한 시민의회를 추진하는 움직임들이 생겨났다. 2019년 여름에는 ‘더 많은 민주주의’ 협회가 ‘시민의회 민주주의’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디 차이트>에서는 ‘독일이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정치와 관련된 질문들을 던진 뒤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은 독자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8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대화에 참여했다. 많은 이들은 서로에게서 싸움 등의 극적인 것을 기대했지만, 실제 발견한 것은 동의와 공감이었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예를 들어 인종주의, 동성애 혐오, 이슬람 급진주의, 무정부주의를 내려놓게 하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실제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다뤄지는 갈등 사례들이 다소 서구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최근 유사한 현상이 일고 있는 우리 사회에도 고민해볼 지점들을 제공해준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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