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최원형 2021. 5. 14.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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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웅거 '포용적 지식경제', 거대한 대안 사회개혁 프로그램 제시
소수 기업 엘리트 전유물로 고립된 지식경제는 경제침체·불평등 야기

지식경제의 도래: 경제의 혁신과 사회적 포용을 위하여
로베르토 망가베이라 웅거 지음, 이재승 옮김/다른백년·2만원

‘지식경제’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 블록체인 등 각종 첨단기술과 이를 바탕으로 전세계에서 돈을 빨아들이는 소수의 새로운 대기업들, 대규모 투자, 승자독식 등을 떠올릴 것이다. 김대중 정부 이후 역대 정부들도 지식경제를 ‘쫓아가야 한다’고 꾸준히 강조해온 덕에, 급변하는 세계 경제에서 언제라도 뒤쳐질 수 있다는 불안과 조바심도 따라붙는다.

브라질 출신 법학자이자 사회개혁가 로베르토 웅거(74)의 2019년작 <지식경제의 도래>는 지식경제를 주요한 동력으로 삼아 거대한 대안적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책이다. 지식경제를 단지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기술들이 사용된 제품·서비스의 확산 정도로 보는 것은 지식경제의 진정한 의미를 간과하고 되레 왜소화하는 접근법에 불과하다. 웅거는 지식경제는 우리 시대에 출현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라는 데 의미를 두고, 현재 경제체제의 ‘프린지’(가장자리)에 고립되어 있는 지식경제를 경제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는다.

먼저 지은이의 전체적인 사상적 면모를 대강 알 필요가 있다. 웅거는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로 ‘비판법학운동’을 주도한 법철학자이며, 브라질 룰라 정권에서 장관을 지내는 등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사회개혁가이다. 그의 정치적 비전은 대체로 ‘실용주의’, ‘실험주의’, ‘제도적 상상력’, ‘영구혁신’, ‘고에너지 민주주의’ 등 자신이 벼려낸 여러 용어들로 표현되는데, 현재 제도에서 출발하되 인간의 잠재 역량에 바탕을 두고 제도를 영구적으로 혁신해가는 방향의 실천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이 주된 특징이다.

브라질 출신의 법학자이자 사회개혁가인 로베르토 망가베이라 웅거. 현재 하버드대에서 강의를 하며 브라질 론도니아주의 사회발전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 책을 관통하는 중심 아이디어는 “현재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인간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기계화된 제조업과 대량생산은 노동자로 하여금 그저 기계의 일부처럼 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생산활동의 수행에서 자본, 기술, 기술 관련 역량 및 과학의 축적”을 이룬 지식경제는, 그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성격에 기대어 제품과 기술뿐 아니라 절차와 방법에서도 혁신을 지속할 수 있는 내재적 속성을 갖출 수 있다. 특히 지식경제는 인간 정신의 회귀적이고 부정적인 역량, 곧 상상력을 필요로 하며, 인간이 서로 협력하고 자연을 바꾸는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지은이는 주목한다.

그러나 현재 이런 지식경제는 경제의 각 부문에서 ‘고립적인 전위’에 묶여 있을 뿐이다. 대다수의 노동자들을 배제한 채 소수의 기업적 엘리트에만 국한되어 있다. 이들은 지식경제의 확산과 심화를 동시에 막고 있는데, 세계 경제의 생산성 증가의 둔화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사실상 이렇게 지식경제를 고립시킨 대가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기술적이고 기업적인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용인하는 것은 그러한 생산방식의 방향과 영감의 가장 큰 잠재적인 원천을 나머지 경제에서 빼앗는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고립된 지식경제를 경제 전 부문으로 확산하는 ‘포용적 전위주의’가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제시한다.

지식경제가 앞선 기계화된 제조업이나 대량생산과 달리 경제 전 부문으로 확산되지 못한 데에는, 지식경제가 어떤 공식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전과 다르게 까다로운 전제조건들을 요구한다는 이유가 있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지식경제를 포용적 전위로 만들기 위해선 교육적-인지적, 사회적-도덕적, 법적-제도적 조건을 만드는 실질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지은이는 교육부터 경제체제, 법제도 등 모든 영역에서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며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다만 이는 어떤 청사진이나 체계가 아니며, 지은이의 ‘영구혁신’ 개념처럼 제도 안에서 시작해 지속적으로 다듬어져 나아가야 할 실천적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지식경제에 대한 통찰로부터 도출되는 일관된 방향성이 제시된다. 예컨대 교육에서는 상상력과 협동에 관련된 권능에 우선권을 부여해, 단순한 기계의 이용자가 아닌 기계 자체를 혁신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법제도와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기존의 질서를 떠받쳐온 유일하고 배타적인 조직 방식에서 벗어나, 경제적 주도권과 생산적 자원·기회에 좀 더 분산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대안들을 열어가는 ‘분산적’ 조처들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소유권자에게 모든 권한을 주는 통일적 재산권만 허용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보유한 청구권들이 함께 작동하도록 만들 수 있다. 지식경제의 실험주의적 충동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나라의 부의 수준에 따라 모든 개인에게 일정한 상속을 주는 ‘사회상속분’이 중요한 안전장치가 된다. 배타적인 지식재산권에는 광범위한 데이터 형성에 기여한 개인들이 일종의 대가를 받는 방식의 변화를 도입할 수 있다. 종속적인 임금노동에서 벗어나 독립자영업과 협동기업 등 새로운 형태의 자유노동이 필요할 수 있다.

이처럼 점진적으로 보이는 변화가 급진적으로 이뤄지려면 대중의 열띤 참여를 전제로 한 ‘고에너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지은이의 기획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다. 지은이는 “민주적인 제도들은 민주주의가 만인에게 약속한 바를 예속과 왜소화의 체험으로 대체하는 경제생활의 특성들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와해시키고 변혁하는 혁신들의 구조를 제공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은이가 펴내는 지식경제 담론은, 자연적이고 완성적인 제도는 없으며 사회와 제도에 갇힌 인간이 언제든 자신의 필요와 열망에 맞게 사회와 제도를 재발명할 수 있다는 철학을 뼈대로 삼는다. “우리는 하나의 체계를 실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도중에 지도를 수정하면서 길을 걷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궤도를 따라서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은 이 경로를 여행하는 하나의 가능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거의 항상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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