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미니픽션] 빈자리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2021. 5. 1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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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일주일 전, 정용은 편의점에 출근하기 바로 직전 누군가 원룸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 보니 초등학교 5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양손엔 콜팝을 하나씩 들고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저기 사콘지 아저씨 안 계세요?”

“누, 누구? 싸, 싸이코?”

“아니요. 사콘지 아저씨요. 왜 맨날 추리닝 입고 돌아다니는.”

정용은 그제야 아이가 진만을 찾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진만은 보름 전 짐을 싸서 원룸을 떠났다. 하지만 정용은 아이에게 지금 없는데, 라고만 얼버무렸다.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아이는 진만과 함께 만화카페에 같이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했다. 자기가 콜팝을 사면 나머지는 아저씨가 내기로 했다는 것.

“근데 왜 그 아저씨가 사콘지 아저씨야?”

정용이 묻자 아이는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콘지 스승님 몰라요? ‘귀멸의 칼날’에 나오는… 아저씨는 사콘지, 저는 탄지로.”

자세히 보니 아이가 메고 있는 책가방 안에 장난감 칼이 한 자루 꽂혀 있었다. 얘야, 스승을 고르려면 신중해야 한단다, 그 어떤 스승도 제자한테 콜팝 쏘라고 말하진 않는단다…. 정용은 힘없이 돌아서 가는 아이를 보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흘 전 오전엔 웬 중년 여성의 방문을 받았다.

“전진만 성도님 계신가요?”

아침 여덟 시에 잠이 들었던 정용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손님을 맞았다. 잠은 덜 깼지만 그 와중에도 정용은 진만이 이곳을 완전히 떠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며칠 자리를 비울 거라고만 말했다.

“이상하네요, 전화도 안 받고… 같이 연습하기로 했거든요.”

“연습이요?”

“네. 지난달부터 저희 성가대에 들어오셨거든요.”

그, 그러면 안 되지 않나요…? 정용은 대뜸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 친구 노래하는 걸 혹시 들어보셨나요? 그러면 정말 안 될 텐데… 하나님한테도 그래선 안 되는데…. 개척교회인가? 신도가 얼마 없나?

“진만이가 교회도 다녔어요?”

“그럼요. 얼마나 신실한 믿음을 갖고 계신데요.”

말이 길어질 것 같아 정용은 서둘러 들어오면 찾아오셨다고 전해드릴게요, 말하고 문을 닫았다. 문 밖에서 중년 여성이 ‘형제님, 형제님 같이 나오세요!’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주일엔 말뚝 근무예요. 정용은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나저나 얘는 도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정용은 침대에 누운 채 잠시 그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정용은 진만 앞으로 배달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카드회사에서 보낸 것인데, 겉면엔 일부러 그런 것처럼 큼지막하게 ‘독촉고지서’라고 적혀 있었다. 정용은 그 고지서를 방바닥에 내려놓은 채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곤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봉투를 열었다. 미납금액은 총 일십칠만사천원이었다. 카드 이용내역은 주로 편의점과 문구점, PC방이었고, 약국도 한 곳 있었다. 카페는 한 곳도 없었다. 일만이천원, 사천오백원, 칠천이백원, 그 금액들이 모여 일십칠만사천원이 된 것이었다. 그것이 정용이 알고 있던 진만의 모습이었다. 정용은 그 숫자들을 오랫동안 노려보다가 오랜만에 진만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만이 원룸을 떠난 후 처음으로 거는 전화였다. 하지만 진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용은 바로 진만에게 문자를 보냈다.

‘얼른 들어와. 카드회사에서 고지서 나왔어. 이거 빨리 해결해야 할 거 아니야.’

정용은 여러 번 단어를 고쳐 적은 후 겨우 문자를 보낼 수 있었다. 기분이 나빠졌다기보단 어쩐지 조금 슬퍼졌다.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은 기분, 원인이 명확한 것은 감정. 그러니 그에겐 그것이 기분인 것이 맞았다. 그는 까닭없이 조금 서글퍼졌기 때문이다. 정용은 늦은 밤까지 진만의 문자를 기다렸지만 다음날까지 그 어떤 답신도 오지 않았다.

진만이 실종된 것은 그즈음의 일이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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