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무소불위법의 두 얼굴

2021. 5. 14.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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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주 워싱턴총국장

미국 수정헌법 17조는 1913년 연방 상원의원 직선 시대를 열었다. 첫 민선 의원이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리 슬레이터 오버맨이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상원 반미 공산주의 조사위원회(오버맨 위원회)를 이끈 인물로, 전시 비상법인 오버맨법을 주창했다. 대통령에게 행정기관 조정과 통합 권한을 부여한 법으로 국방물자생산법(Defense Production Act)의 모태다.

국방물자생산법은 미·소 냉전과 한국전쟁이 맞물린 1950년 9월 발효됐다. 대통령이 광범위한 통제권을 갖고 민간에 국방물자 생산을 우선 요구할 수 있다. 원료와 자재도 징발할 수 있다. 50번 넘게 의회 재승인을 거쳐 전시는 물론 재해나 테러, 비상사태에서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무소불위 권한으로 자리잡았다.

그 막강한 법이 단단히 탈이 났다. “코로나 백신 원료의 미국 밖 금수 조치를 풀어달라”는 인도 세룸 인스티튜트 CEO의 지난달 대미 공개 호소는 큰 파장을 불렀다. 아스트라제네카와 노바백스 백신 1억 6000만회 분을 매달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이 미국 때문에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세계 최대 백신 제조업체의 하소연에 국제적 원성이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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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싱크탱크 케이토연구소는 최근 트럼프·바이든 행정부에서 연이어 발동된 국방물자생산법이 백신 원료 수출을 사실상 봉쇄했다고 비판했다. 법 집행의 컨트롤타워가 불분명하고, 비상법이라는 이유로 절차적 지침도 없고, 독립 기관의 평가나 감사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의회 조사국도 앞서 투명성과 책임 소재가 분명하지 않다고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미국은 국방물자생산법과 백신 특허권을 틀어쥐고 화이자와 모더나, 양대 백신과 원료, 장비를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세계적 백신 공급난과 수급 불균형은 날이 갈수록 심화했다. 엄혹한 현실을 외면한 지나친 자국 이기주의라는 비판은 인권을 가치로 동맹을 복원해 지도력을 되찾겠다는 바이든 정부의 공언과는 배치된다.

지난 4일 민주당 연방 하원의원 100명이 넘게 서명한 특허권 포기 촉구 서한이 백악관에 발송됐다. “특허권 문제는 결정된 바 없다”며 머뭇거리던 바이든 대통령은 우군인 민주당과 국제 사회의 쌍끌이 압박에 하루 만에 특허권 포기 지지로 선회했다. 이제 공은 세계무역기구(WTO)로 넘어갔다. 그러나, 일부 유럽 회원국과 백신 업계의 반발로 합의를 이뤄낼 수 있을지 매우 불투명하다.

워싱턴 외교소식통은 “백신과 원료 반출에 대한 미국의 공식 통제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유무형의 압력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미국 우선주의의 벽은 그만큼 높고 견고하다. 무소불위법의 위력 또한 그대로다.

임종주 워싱턴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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