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방북 이유? 작가로서 창피했다..감옥서 말 잊어" 후유증 고백 ('대화의 희열3')[종합]

이우주 2021. 5. 1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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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닷컴 이우주 기자] '대화의 희열3' 황석영이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 다운 비범한 일대기를 공개했다.

13일 방송된 KBS2 '대화의 희열3'에서는 황석영 작가가 첫 게스트로 출연했다.

황석영 작가는 역대 '대화의 희열' 게스트 중 가장 긴 이력을 가지고 있다고. 만주 출생부터 남다른 이력을 뽐내는 황 작가는 6·25전쟁부터 4·19혁명, 5·18 민주화 운동 등을 모두 겪은 산증인. 황석영 작가는 "우리 또래들 다 그럴 거다"라고 했지만 김중혁 작가는 "또래들 중에서도 유독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고등학생 황석영은 4·19 혁명 현장에 있었다. 황석영 작가는 "학교가 청와대 앞에 있었다. 4교시 쯤에 총소리가 들리더라. 4교시 끝나니까 학생들을 다 집에 보냈다. 하교하다 군중에 휩싸였다"며 "경찰들이 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쏘더라. 뛰고 보니까 친구가 쓰러졌다. 넘어진 줄 알고 일으켰는데 관자놀이에 총을 맞아서 피가 쏟아지더라. 병원 가는 차에 친구를 싣고 응급실을 갔는데 병원 뒷마당에 시신을 모아놓은 곳에 친구가 있더라"라고 털어놨다.

충격적인 장면을 직접 목격한 후 황석영은 방황을 시작, 고3때 결국 퇴학 당했다. 이후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던 황석영.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는 만만치 않았다. 황석영은 "어머니가 작가라는 건 제 팔자를 남에게 내주는 거라더라"라며 당시 어머니가 반대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결국 황석영은 가출 후 지방의 공사장을 떠돌다 우연히 절에 갔다. 스님이 되기 위해 절 생활을 시작했지만 어머니가 찾아왔다. 어머니를 만난 황석영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26세 나이에 베트남 전쟁에 파견된 황석영. 황석영은 적을 직접 맞닥뜨린 적은 없지만 적의 시신들은 많이 봤다며 "날씨가 덥고 습하니까 시신이 부패한다. 거기에 도마뱀, 들쥐가 들끓는 걸 보면 귀신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후에도 그 장면이 꿈에 나오며 트라우마가 됐다. 황석영은 "역사적 사회적 트라우마가 개인에게 돌아올 때 귀신이 발생하는 것"이라며 "자고 있는데 동생이 내 팔을 밟았다. 나도 모르게 화병을 휘둘러 동생에게 내리쳤다. 어머님이 목사님을 불러서 안수기도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황석영의 작품 속엔 사회적 사건들이 늘 배경에 있었다. 농민학교, 문화학교를 운영하던 황석영이 향했던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인생의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황석영은 5·18 민주화운동 현장엔 없었다고. 황석영은 "소극장을 만들기 위한 출판 계약금을 받으려 서울에 갔다. 5월 17일에 신촌 술집에 있는데 한 젊은이가 날 보더니 큰일 났다고 하더라"라며 5·18 민주화 운동의 시작을 떠올렸다. 광주로 돌아갈 수 없었던 황석영은 "서울에서 할 수 있는 걸 하자"며 광주의 실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5·18 민주화 운동의 참상을 최초로 알린 책이다. 황석영은 책 출판 배경에 대해 "광주에선 살아남은 사람들의 부끄러움이 있었다. 비겁하게 살았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난 서울에 있어서 그게 더 심했다"며 위험을 무릅쓰고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황석영에겐 유언비어 유포죄가 적용됐지만 책의 파급효과는 매일 1000권씩 복사될 정도로 엄청 났다.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곡이라 할 수 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작자 역시 황석영이었다. 황석영은 "유족들을 못 모이게 하더라. 근데 경조사는 된다"며 시민군의 대변인과 '들불야학' 창립자의 영혼결혼식을 시키며 유족들을 처음으로 모이게 했다. 이후 욕심이 생겼다며 '임을 위한 행진곡'까지 제작하게 된 것.

1989년엔 황석영의 방북 소식이 알려져 세간에 충격을 안겼다. 황석영은 북한에 갔던 이유에 대해 "일본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짓궂게 북한에 대해 물어봤다. 한 번도 안 가봐서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때 누군가 손을 들더니 분단의 운명을 체념하면 어떻게 하냐고 하더라. 당시에 너무 창피해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사회의 금기를 파격적으로 깬 황석영은 "방북으로 잃은 건 별로 없다. 시간이 지체돼서 이 나이까지 글 쓰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뉴욕, 베를린에서의 망명 기간 동안 얻은 것도 있었다며 "한반도라는 좁은 시선에서 벗어났다"고 밝혔다.

황석영은 "나는 작가다. 광대는 그걸로 사는 것"이라며 "사회적 터부나 억압을 산산히 부수고 일상화시켜야 하는 게 작가라고 생각한다"고 작가로서의 소신을 밝혔다.

수감 생활 중에도 면회 온 지인들에게 농담을 건넬 정도로 '광대 본능'을 숨길 수 없는 황석영이었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황석영은 "감옥 후유증 중에 심각한 게 말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황석영B를 만들어 혼자 대화를 했다. 지금도 그게 남아 있어서 아직도 중얼거려 아내가 놀란다"고 털어놨다. 작가는 관념보다 관계를 중요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황석영은 "책을 놔버리고 수감자들과 놀자"고 다짐해 수감자들과 말동무를 하며 지냈다고. 황석영은 수감 생활 중 가장 괴로웠던 것으로 수용자의 집필권 제한을 언급했다.

wjlee@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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