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민.크리그림] 인천과 몬테네그로의 연결고리

김형중 2021. 5. 1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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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닷컴] 2007년 런던에서 장외룡 당시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을 만났다. 시간이 맞을 때면 장외룡 감독은 만사 제치고 축구 현장을 찾았다. 프리미어리그를 비롯해 챔피언스리그, FA컵 등 많은 경기를 보러 다녔다. 축구를 글로 배운 나로서는 ‘진짜 축구 전문가’에게 귀동냥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영국 축구 현장에서 우리는 무척 이질적 존재였다. K리그 기자석에서 외국인이 경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뭔가 열심히 적는다고 생각해보라. 가치 판단에 앞서 존재 자체에 먼저 궁금해질 게 뻔하다.

축구에서는 관계성이 없어 보이는 대상끼리 연결되곤 한다. 1888년 잉글랜드축구협회가 프로축구리그를 차렸을 때만 해도 한국인 선수는 물론 관중석의 태극기, 취재석의 검은머리 인간들을 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미드필더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지금도 신처럼 받들어지고, 베트남 국가대표팀 경기에서는 금성홍기와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인다. 축구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금색 쌍두 독수리가 새겨진 붉은색 국기를 봤다. 단언컨대 내 친구 중에 이 깃발의 정체를 아는 녀석은 한 명도 없다. 우리 눈에 몬테네그로 국기의 디자인은 약간 공격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록밴드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유럽에서 몬테네그로는 그림엽서처럼 예쁜 코토르만으로 유명한 곳이다. 2021년 현재 인천 축구의 최고 레전드인 스테판 무고사(29)가 인천과 몬테네그로의 연결고리다. 대한민국과 몬테네그로는 별 인연이 없지만, 인천만큼은 좀 다르다.


외국인 선수라고 해서 누구나 낯선 K리그에 조국의 깃발을 꽂는 권리를 누리진 못한다. 이방인은 국내 선수보다 두 배 이상 값어치를 입증해야 한다. 생면부지 동료들과 함께 헌신하는 모습도 필요하다. 실력으로 가치를 증명하고 헌신으로 팬심을 사는 과정을 차곡차곡 밟은 다음에야 선수와 팬 사이에 교감이 생겨난다. 그 결과가 낯선 곳에 낯선 국기의 등장이란 형태로 나타난다. 무고사는 2018년 인천에 온 이후 K리그 95경기 45골 10도움을 기록 중이다. 득점력, 헌신, 충성심에서 만점이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 걸리는 몬테네그로 국기는 당연한 인과다.

인천과 몬테네그로의 인연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몬테네그로가 독립하기 전에 ‘얌마 투게더’ 제난 라돈치치가 왔고, 2007년에는 데얀 다미아노비치가 뜨거운 한 시즌을 보냈다. 인천의 몬테네그로 선수들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한국에서 깊은 정을 쌓았다. 라돈치치의 ‘길거리’ 한국어와 엉뚱한 행동은 철없는 10대 소년처럼 귀여웠다. 데얀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인터뷰이였다. 영어가 유창한 데다 직설적인 화법이 인터뷰를 편하게 해줬다. 코토르만에 딸 이름을 붙인 호텔을 열었다며 열심히 홍보하기도 했다. 무고사는 인천 팬들 가슴 속에 ‘스트롱맨’으로서 자리 잡았다. 강등 사투 속에서 그렇게 죽으라 뛰는 이방인은 유럽 축구에서도 드물다.

알다시피 올 시즌 무고사는 힘들다. 시즌이 개막하기 전부터 코로나19에 얻어맞았고, 부친과 사별하는 아픔까지 겹쳤다. 동료들이 검은 리본을 달고 뛴들 가족을 잃은 당사자의 슬픔을 온전히 어루만질 수 없다. 프리시즌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늦게 출발했으니 기어 변속이 더디다. 실력이 사라질 일은 없지만, 제 모습을 찾을 때까지 인천 팬들은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나마 시즌 초반 팀의 성적이 예년처럼 최악이 아니라는 점이 유일한 위안거리다.

홈에서 포항을 상대했던 K리그 15라운드에서도 무고사의 몸은 무거웠다. 상대 진영에서 벌이는 몸싸움은 힘겨워 보였고, 아니나 다를까 무고사 앞에서 득점 기회가 만들어지는 상황은 거의 없었다. 힘들 때일수록 관중석에 걸린 몬테네그로 국기가 무고사에겐 소중해 보였을 것 같다. 해외 여행길에서 한국 기업의 광고만 봐도 괜히 반가운 기분 있지 않은가. 침묵 속에 진행되는 코로나19 속 축구 경기라서 붉은 국기의 소리없는 외침이 무고사에게 더 크게 들리지 않았을까?

글, 그림, 사진 = 홍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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