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소득 어르신·어린이·장애인에 의약품 "도움 주면 누군가 희귀병 내 딸을 돕겠죠"

류인하 기자 2021. 5. 12.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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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째 어려운 이웃에 '나눔' '백련산허준약국' 정윤석 약사

[경향신문]

정윤석 약사 부부(가운데)와 딸 효주양이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1동 주민센터에 의약품을 기증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대문구 제공
‘우리 동네 나눔가게’ 참여 활동
약국은 어르신들 사랑방으로
은평구약사회도 “동참하겠다”
“번 돈을 딸에게 쓸 수도 있지만
나눔이 돌고 돌아 제도화되길”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정윤석씨(46)가 최근 딸 효주양(10)과 집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한 아이가 자신의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저 누나는 나보다도 큰데 말을 못해. 이상해.” 자신의 딸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제법 익숙해졌지만, 그날따라 그 아이의 말과 표정이 정씨의 마음에 박혔다. 아이 엄마의 당황하는 모습과 “죄송하다”는 말은 되레 상처로 남았다. 정씨 부부의 외동딸 효주양은 ‘피트 홉킨스 증후군’을 갖고 태어났다. 국내에 환자 수가 극히 적고 치료약이 없는 희귀병이다.

정씨는 식당을 나온 뒤 곧장 딸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향했다고 한다. 장애가 있으니 비싸고 예쁜 옷이라도 사 입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옷을 잔뜩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때뿐이었다.

“효주를 위하는 것이 무엇일까. 효주는 비싸고 예쁜 옷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을 향한 말들과 시선을 이해하지도 못할 텐데…,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 것이죠.”

정씨 부부가 찾은 답은 ‘나눔’이었다. 자신들의 기부행위로 누군가 도움을 받고, 도움을 받은 사람이 훗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딸에게도 좀 더 친절한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은평구에서 ‘백련산허준약국’을 운영하는 정윤석씨 부부는 최근 사비 800만원을 들여 저소득 가정의 어린이와 장애인, 어르신을 위한 의약품을 기부했다. 아동·성인용 종합영양제와 각종 소독약, 밴드, 모기약, 소화제, 진통제, 파스 등 일상에서 필요한 약품들이 남가좌1동주민센터와 서대문발달장애평생교육센터, 시립서대문농아인복지관에 고루 전달됐다.

정씨 부부에게도 800만원은 큰돈이다. 11일 약국에서 만난 정씨는 “직장생활을 하다 둘 다 약대에 진학하면서 몇 년간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형편도 넉넉한 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씨는 그러나 “우리가 번 돈을 모두 딸에게 쓸 수도 있겠지만 크게 보면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을 시작하면, 그 일을 시작으로 누군가는 또 내 딸을 도와줄 것이고, 나아가 제도로 만들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기부를 결심한 배경을 밝혔다.

사실 이들 부부에게 ‘나눔’은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다. 정씨는 효주양이 태어나기 전인 2010년부터 저소득층 아이들, 희귀병 환자들을 위한 각종 정기후원 활동을 해왔다. 2017년부터는 서대문구의 ‘우리 동네 나눔가게’에 참여하며 기부활동을 계속했다. 아파트 친구모임을 통해 매년 정기적으로 모금액에 사비를 보태 저소득 어르신, 어린이, 장애인을 위한 영양제 등 각종 의약품 등을 기부했다.

정씨 부부가 운영하는 약국은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을 한다. 집 근처 약국을 마다하고 지하철 몇 정거장 거리의 이곳을 일부러 찾아오는 고객도 많다. 그는 모든 약국 방문자들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궁금하거나, 응급실에 달려가기 애매한 사항이 생겼을 때면 약국 고객들은 그에게 전화를 건다. 정씨는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하나라도 더 있다면 그 자체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의 나눔은 계속될 수 있을까.

“제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은평구약사회도 함께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 덕분에 내년에도 또 이렇게 (기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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