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간판·금 간 담벼락..강릉의 공기에 더해진 세월의 맛

강릉 | 글·사진 김종목 기자 2021. 5. 1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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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강원학연구센터서 꼽은 노포 17곳,
교동짬뽕·감자옹심이·장칼국수·소머리국밥 등 1박2일로는 모자란 ‘미식로드’
ㆍ강릉 유일한 국보 대도호부 관아 옆엔 단오제 시작되는 칠사당…
‘초당두부 원조’ 허난설헌·허균의 고택 등 볼거리도 풍성

눈에 먼저 띈 건 간판이다. 철제 간판에 입힌 페인트칠은 벗겨져 나갔다. 플렉스 간판도 빛이 바랬다. 2000년대 이후 간판 정비 바람이 불 때의 기준이라면 철거나 미화의 대상이다. 크기도, 디자인도 제각각인 간판들이 노포를 알리는 증표 같아 보였다. 금이 간 시멘트 블록 담도 음식의 깊고 오랜 맛을 입증하는 듯했다. 낡음의 지표가 추함이 아니라 미식을 가리켰다. 그 간판과 담벼락 아래에서 사람들이 줄 서 기다렸다.

지난 2~3일 강릉의 노포를 찾았다. 강원학연구센터(gangwonstudies.re.kr)가 지난해 12월 출간한 <강원의 노포>(신성환 지음)를 최근에야 봤다. 책은 142곳의 강원 노포 목록을 부록으로 실었다. 강릉은 17곳. 1박2일 출장 기간에 다 가볼 수는 없었다. 일정도 걸림돌이지만, 위장이 버텨낼 수 없다. 1950~1990년 개업한 집 중 짬뽕집이 3곳, 옹심이집 3곳, 순두부집 3곳, 장칼국수 집이 2곳. 강릉역을 기준으로 첫째 날은 서쪽, 둘째 날은 동쪽을 돌았다. 먼저 개업한 집을 기준으로 목적지를 순차적으로 정했다. 강원학연구센터 홈페이지나 구글에서 ‘강원의 노포’를 검색하면 책 PDF 파일이 바로 뜬다.

강릉감자옹심이 본점 담벼락. 노포는 음식 맛 뿐만 아니라 오래된 간판이나 담장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첫 목적지는 하슬라로 232번길 교동짬뽕 강릉본점. 1975년 개업했다는 집이다. 2일 정오쯤 도착했다. 10여명이 줄을 선 채 기다렸다. 대형 유리창엔 배우 하정우씨의 사인이 붙어 있다. 20여분 기다렸을까. 코로나19 명부에 전화번호와 주소를 기재하다 윗줄에 무심코 눈이 갔다.

서울과 경기라고 적은 이들이 3분의 2가량 됐다.

짬뽕과 군만두를 주문했다. 홍합 씹히는 맛이 좋다. 매운 걸 좋아하는데도 얼얼했다. 입안을 군만두로 중화했다. 중국집 맛을 가르는 개인적 척도 하나가 양파다. 갓 썰어 나온 듯 아삭하게 씹혔다. ‘짬뽕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라’는 안내판의 권유는 따를 수 없었다. 다른 노포에서 먹을 음식을 위해 위장을 비워둬야 했다.

벌집칼국수는 1978년 개업했다. 간판이 세월을 웅변한다.

1층은 가게, 2~3층은 주거용 상가주택이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2012년 문을 열었다고 한다. 간판엔 ‘Since ○○○○년’이 없다. 목록이 틀렸나? 1975년 이 자리에 짬뽕집이 있었다고 한다. 맛나게 먹었으면 그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임영로와 강릉대로가 만나는 지점이 교동사거리다. ‘교동짬뽕’ 하면 떠올리는 거리다. 원조강릉 교동반점(강릉대로 205)이 여기다. 낡은 간판엔 ‘Since 1979’라고 적혀 있다. 짬뽕 맛을 비교할 요량으로 먹어볼까 하다 가게 앞 20여m 선 줄을 보고 포기했다. 맞은편 형제칼국수(1985년 개업)도 문전성시다. 강릉감자옹심이본점(1990년 개업, 토성로 171)으로 이동했다. 멸치와 다시마 육수에 강판에 간 감자와 앙금을 섞어 반죽한 옹심이 위에 김과 깨 같은 고명을 얹어 낸다. 육수와 만난 전분이 걸쭉하면서도 담백한 맛을 냈다. 그 맛이 짬뽕으로 차오른 위장의 빈틈으로 스미듯 들어갔다.

디지털강릉문화대전에 따르면, ‘향토 음식’ 기준은 △지역 특산물 재료 △고유한 조리법 △대중용 일상 음식 △고유 음식을 새로운 형태로 개발(예: 짬뽕순두부) 등이다. 감자를 주재료로 한 ‘감자옹심이’가 이 기준에 맞아떨어진다.

가난한 역사도 작용한다. 감자옹심이는 쌀이 모자라 해먹던 음식이다. 감자는 대표적인 구황 작물이다. 장칼국수도 소금이 귀해 고추장 같은 장을 물에 풀어 얼큰하게 끓인 것이다.

월화거리는 강릉 지역의 고유 설화인 ‘무월랑’과 ‘연화 부인’의 사랑 이야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월’과 ‘화’를 각각 땄다. 두 사람은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 6세손인 강릉 김씨 시조 명주군왕(溟州郡王)의 부모라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경강로 월화거리로 이동했다. 강릉~원주 고속철도 도심 구간 지하화로 생긴 폐철도 부지에 만든 거리다. 강릉 지역 고유 설화인 ‘무월랑’과 ‘연화부인’의 사랑 이야기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월’자와 ‘화’자를 따 지었다. 무월랑과 연화부인 조형물이 풍물시장 초입에 들어섰다. 오래된 건물엔 카페 같은 시설이 들어갔다. 전형적인 ‘도시재생’의 결과물이다. 월화거리 곁 중앙시장통은 발 디딜 틈이 없다. 고로케니 닭강정을 만드는 집들은 방송을 탄 곳들이다. 교동사거리에서 월화거리까진 걸어서 10여분 거리다. 일대가 거대한 먹거리 장터 같았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가는 길 싸전(금성로 54)에 들렀다. 1987년 개업한 이 집은 도넛 등을 판매한다. 쉬는 날이었다. 다음날 장사를 위해 밀가루에 계란 반죽을 하던 주인은 인터뷰를 고사했다. 웬만한 노포엔 방송 사진을 걸어두곤 하는데, 이 집은 오래된 간판과 가격표, 매대밖에 없다.

강릉대도호부 관아 칠사당. 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 등 7가지 일을 다루는 관청이란 뜻이라 칠사당이다. 일제 강점기엔 일본 수비대가 주둔했다. 1958년까지는 강릉시장 관사로도 쓰였다. 은행나무 수령은 560년.

고려말 설치해 조선말 폐지된 강릉 대도호부의 관아는 옛 강릉의 지정학을 가늠하는 지표다. 전대청에 걸린 ‘임영관(臨瀛館)’ 현판은 1366년 공민왕이 쓴 것이라고 한다. 임영관은 일제강점기 대부분 파괴됐다. 삼문이 유일하게 남았다. 고려말 주심포계 건축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라 한다. 강릉 문화유산 중 유일한 국보(제51호)다.

관아 일대는 고즈넉했다. 노포 맛집과 시장통의 부산함과 소란함을 떨쳐낼 수 있는 공간이다. 관아 왼쪽 칠사당(七事堂)으로 수령 560년 된 은행나무가 그늘을 드리웠다. 문화해설사 최춘옥씨는 “참 예쁜 곳인데 사람들한테 덜 알려졌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엔 일본 수비대가 주둔했다. 1958년까지는 강릉시장 관사로도 쓰였다.

명주동도 레트로(복고풍)가 유행이다. 봉봉방앗간은 이른바 핫플레이스 중 한 곳이다.

강릉단오제는 칠사당에서 시작한다. 최씨는 “이곳에서 신주 빚기를 했다. 축제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단오제는 칠사당 도로 맞은편 지금 명주동, 남문동, 성내동, 용강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명주동 일대는 ‘레트로’로 떠오른 곳이다. 청년들이 낡은 집에 든 카페 앞에서 기념 사진을 촬영했다.

신라 시대 하슬라주를 설치했다. 통일신라 때 명주로 고쳐 불렀다. 강릉 김씨 시조인 명주군왕 김주원 어머니가 연화부인 박씨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명주동 초입엔 ‘시나미 명주’라는 입간판이 있는데, ‘시나미’는 ‘천천히’란 뜻의 강릉 말이다. 골목길을 천천히 돌다 보면, 유적 한 곳이 나온다. 고려말~조선초 축성된 읍성의 경계를 이룬 바윗돌은 지금 주택과 주차장의 담벼락 역할을 하며 박혀 있다.

명주동 강릉읍성 유적. 앞은 주차장이다.
내곡교에서 바라본 남대천. 좌측에 강릉의료원 삼거리쪽에 강릉 읍성 남문인 어풍루가 들어섰다. ‘어풍’은 신선이 바람을 탄다는 뜻이다. 바람 많은 강릉에서 이 자연 현상을 다스리려는 의지를 담은 이름이라고 한다.

읍성의 남문인 어풍루가 들어선 곳이 명주동 옆 동네인 남문동 강릉의료원 앞 삼거리 부근(추정)이다. 신선이 바람을 타는 ‘어풍(馭風)’에서 딴 이름이다. 바람을 잘 다스리려는 의미도 담았다고 한다. 더 오래된 강릉을 보려면, 남대천을 건너 내곡동 신복사지로 가면 된다. 남대천은 강릉항 죽도봉 앞바다로 이어진다.

폐사지에 남은 건 삼층석탑과 석조보살 좌상이다. 좌상이 석탑을 향해 무릎 꿇고 공양하는 자세로 있다. ‘원통 모양의 높은 관, 동굴동글한 얼굴, 미소 띤 입술’이 고려 전기 강릉 일대에서 유행하던 표현 양식이라고 한다.

신복사지 문헌 기록은 없다고 한다.석조보살좌상과 삼층석탑, 가람배치가 전형적인 고려 양식이라고 한다.
남대천은 강릉 시가지를 거쳐 동해로 흐른다. 강릉부사가 집무하던 동헌 앞(남쪽)으로 흘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남대천은 산책로를 뒀다. 월화거리 일대와 신복사지를 들른 뒤 산책로를 따라 경포대로 가던 중 촬영했다.

첫날 마지막으로 들른 노포는 광덕식당이다. 소머리국밥집이다. 1950년 개업했다. <강원의 노포> 목록에서 가장 위에 오른 집이다. 뽀얀 사골국물 맛이 담백했다. 밥에도 윤기가 흘렀다. 가격은 8000원인데, 올해 채소 값 폭등 때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1000원을 올렸다고 한다. 목록 따라 왔는데 2호점이다. 1호점은 중앙시장에 있다.

이튿날 초당동 유적부터 들렀다.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 삼국시대의 주거지와 고분유적이 함께 분포하는 복합유적이다. 유적을 감싼 소나무들만 눈에 들어왔다. 지난 3일은 맑았다. 어딜 가든 고개를 들면 소나무와 구름이 한데 어울리며 풍경을 만들어냈다. 솔향기가 순간의 바람을 타고 콧구멍을 훅하고 파고든다. ‘솔향 강릉’을 내세운 도시답다.

운정교에서 바라본 경포가시연습지와 경포호 일대. 운정교 왼쪽으로 선교장, 오죽헌 가는 길이 이어진다.
초당동 초당동 유적에선 빗살무늬토기편 등 주로 신석기 유물이 나왔다. 철기, 삼국시대 유물도 분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근 초당두부 집들이 밀집했다. 소나무, 푸른하늘, 구름 한점이 일체의 풍경을 이뤘다.
선교장은 강릉의 대표 관광지 중 하나다. 청룡길과 백호길 둘레길도 나 있다. 선교장과 강릉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백호길에서 본 풍경.

초당두부의 원조로 알려진 허엽의 자녀 허난설헌과 허균이 태어난 고택을 들렀다. 경포호를 따라 선교장으로 향했다. 강릉의 대표 관광지인 선교장은 유명하다. 선교장 뒤 능선의 청룡길(우측)과 백호길(좌측)을 사람들은 놓치는 듯했다. 옛 강릉의 건축물 위로 지금 강릉의 모습이 중첩된다.

초당두부를 빼놓을 수 없다. 1960년대 생겼다는 초당 고부순두부를 찾아갔다. 월요일(3일)은 쉬는 날이었다. 반려견을 데리고 이 순두부 집 마당으로 산책 나온 주민이 “여긴 강릉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이라고 전했다.

선교장 산책로 청룡길.
선교장 고택에서 팬더 인형을 만났다.

노포들 주메뉴에서 세월이 빚은 깊은 맛이 났다. 김치와 깍두기 같은 밑반찬도 좋았다. 일정 때문에 맛을 비교할 순 없었다. A씨는 “사람이 많아 노포는 잘 찾지 않는다. 짬뽕 같은 건 동네에서 먹는다. 별 차이 없다”고 말했다. B씨는 “노포로 알려진 곳이 조금 더 낫긴 하다. 유명 노포 중엔 그 맛이 변한 데도 있다”고 했다.

강릉 노포 17곳이 강릉의 모든 음식과 식당을 대변하는 건 아니다. 감자밥, 강냉이밥, 경포부새우젓, 오징어순대, 옥수수범벅, 물곰탕, 강릉삼숙이탕 같은 향토음식이 있다. 월화거리관광안내센터의 김희령씨는 “강릉은 산과 들, 강과 바다를 다 볼 수 있어 좋다”고 했는데, 음식도 이런 지형 특색을 아우른다.

음식·식당 정보는 디지털강릉문화대전(gangneung.grandculture.net)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강릉 |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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