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자료에 미쳐 스스로 '정리 감옥' 갇혔지만 행복해요"

김보근 2021. 5. 1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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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극동문제연구소 김광운 초빙석좌교수
김광운 교수가 지난 6일 북한대학원대학교 연구실에 비치된 <북조선실록> 앞에서 1000권까지 편찬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사진 김보근 선임기자

“북한의 과거를 정확히 알 때, 남북이 함께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최근 <북조선실록>을 100권까지 펴낸 김광운(62)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석좌교수의 ‘소신’이다.

그가 북한대학원대·경남대와 손잡고 2018년부터 편찬을 맡고 있는 <북조선실록>은 1945년 8월15일부터 김일성 주석 사망일인 1994년 7월8일까지 반세기 북한에서 일어난 일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는 첫 편년체 사료집이다. 한 권당 평균 800쪽짜리 100권을 펴냈지만, 아직 1950년대 초반까지만 기록했을 뿐이다. 이번 3차 간행본은 1953년 7월1일~54년 9월23일까지 자료(98~124권)이고, 1951년 12월19일~53년 6월30일까지 한국전쟁 시기(74~97권)는 연말까지 나올 예정이다. 1994년까지 정리해낸다면 1000권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주말도 없이 하루 10시간 넘게 <북조선실록> 편찬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김 교수를 지난 6일 서울 삼청동 북한대학원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1945년 8월15일~1994년 7월8일까지’
2018년부터 ‘북조선실록’ 편찬 주도
최근 ‘50년대 초반까지’ 100권 발행
연말까지 한국전쟁기 23권 추가 목표
13일 북한대학원대학서 국제심포지엄

1990년대 후반 국사편찬위 시절 기획
“북의 역사 알아야 남북 미래도 가능”

이 거대한 작업의 출발점은 ‘남북 어디에도 북한 역사를 정확히 기록해놓은 곳은 없다’는 김 교수의 문제의식이었다.

“북한은 ‘당의 무오류성’이라는 정치신념 아래 ‘승리의 역사’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남한은 <노동신문>을 결호 없이 보관해놓은 기관이 한 곳도 없을 정도로 북한 관련 자료 자체가 취약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그를 ‘북한 자료에 미친 사람’으로 만들었다. 1992년 국사편찬위원회에 들어간 뒤 대한민국사를 연구하던 그는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북한 자료 수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국내는 물론 미국·중국·러시아 등 북한 자료가 있는 곳은 어디나 쫓아갔다. 대부분은 자료를 자비를 들여 샀지만, 때에 따라서는 대량의 자료를 거저 얻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여러 기관에서 인력을 줄이면서 자료실부터 없앴습니다. 그때 폐휴지가 될 뻔했던 귀중한 북한 관련 자료를 얻을 수 있었고, 중국에서도 대학 통합으로 생긴 ‘복본’들을 그냥 얻어왔습니다.”

그렇게 모은 자료는 현재 경기도에 있는 물류창고 두 곳을 채울 분량이 됐다. <노동신문>은 결호 없이 모았고, 북한 군부에서 내는 신문인 <조선인민군>을 비롯 각종 잡지와 단행본 그리고 북한이 생산한 자료집 등등 국내에서 김 교수만이 소장한 것이 많다.

“이렇게 귀한 자료를 모아만 놓고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에 죄를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품을 팔아 모았지만, 그것을 정리해서 다시 세상에 내놓는 것도 자료를 모은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것이 2018년 이후 “언제 끝날지 모를 ‘사료 정리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이유였다.

그러나 그 감옥은 ‘기쁨의 감옥’이기도 하다. 100권까지 <북조선실록>을 만들면서 그 자신도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됐기 때문이다. 6·25전쟁에 참전한 미8군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의 사망 날짜와 관련된 것도 그 중 하나다.

“한국전쟁 당시 파견된 미8군에서는 워커 장군이 1950년 12월23일 오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는데, 북한 <노동신문>은 이미 12월23일치에 사망 기사가 실려 있어요.”

김 교수는 현재 도서출판 ‘민속원’과 ‘선인’이 맡고 있는 <북조선실록> 국내외 판매 현황을 통해서 현재 북한 연구의 흐름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미국 대학의 <북조선실록> 구입 규모가 국내 대학보다 더 많다는 점도 특이한 점”이지만, “베이징대학 등 중국 북방쪽 대학보다 광둥대학 등 남방쪽 대학의 구매가 많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 “자본이 풍부한 중국 남부 지역에서 여전히 북한 개방 때 대규모 투자를 염두에 둔 연구를 진행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앞으로 ‘실록’ 편찬 과정에서 북한의 참여를 요청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2001~07년 국사편찬위에서 일할 때 북한 당사연구소와 협력한 경험을 활용할 계획입니다.”

김 교수는 그때 국사편찬위에서 펴낸 <북한관계사료집>에 북한 당사연구소에서 번역한 ‘소련’ 자료를 포함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는 앞으로 펴낼 <북조선실록>에 북한이 1950년대와 60년대 발표했던 여러 평화제안들도 제대로 정리해서 넣을 계획이다. 그때 북한은 ‘남북 군인 규모를 10만명으로 감군하자’ ‘모든 분쟁문제를 회담과 협상의 방법에 의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제안들이 그 동안 북한의 ‘평화 공세’로 치부돼 남한 사회에서 제대로 기록도 연구도 이뤄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교수는 현재의 꽉 막힌 남북관계를 뚫고 함께 한반도 평화체제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과거 북한의 제안들도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는 그가 북한의 과거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는 일이 미래의 한반도 평화를 모색하는 길이라고 믿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북한대학원대·경남대는 <북조선실록> 출간 100권을 기념해 13일 북한대학원대학에서 ‘북한 연구와 자료’를 주제로 국제심포지엄을 연다. 심포지엄에서는 박재규 경남대 총장이 개회사를 맡고, 정용욱 서울대 교수, 제임스 퍼슨 미 존스홉킨스대 교수, 리팅팅 중국 베이징대 교수, 이소자키 아쓰히토 일본 게이오대 교수 등 북한 연구의 미래를 이끌어갈 소장학자들이 참석해 <북조선실록>의 성과와 가능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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