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의리적 구토'와 단성사.. 100년전 한국영화를 찾아

2021. 5. 12.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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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배우 윤여정씨가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나리' 영화로 여주조연상을 받았다. 한국인 최초로 아카데미에서 연기상을 받은 것이다. 윤 씨는 시상식에서 "고(故) 김기영 감독님께 감사드린다. 제 첫 감독님이셨다. 여전히 살아계셨다면 저의 수상을 기뻐해주셨을 것이다"고 말해 뭉클함을 자아냈다. 그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아카데미가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한국 영화사를 다시 쓴 쾌거를 맞아 100년 전 단성사(團成社)로 여행을 떠나보자.

1919년 10월 26일자 매일신보는 영화 '의리적(義理的) 구토(仇討)' 또는 '의리적 구투(仇鬪)'를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조선인 배우의 활동사진이 아주 없어서 유감 중에, 이번 단성사 사주 박승필(朴承弼)씨가 5천여원의 거액을 내 신파신극좌 김도산(金陶山) 일행을 데리고 경성 내외의 경치 좋은 장소를 따라가며 찍은 것이 네 가지나 되는데 모두 좋은 활극으로만 찍었다고 한다. 오는 27일부터 단성사에 상장(上場)한다는데, 먼저 그 사진을 시험해 본 즉, 사진이 선명하고 미려할뿐더러 배경도 말할 것 없어 서양사진에 뒤지지 않을 만하게 되었고, 배우의 활동도 장쾌하고 신이 날만하게 되었더라."

매일신보에 따르면 영화 촬영장소는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영미교(穎美橋; 종로구 숭인동과 중구 황학동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 남대문 정거장, 독도(纛島; 뚝섬), 전관교(箭串橋; 살곶이 다리), 노량진 등이었다. 제작자 박승필은 개봉을 앞두고 매일신보에 광고도 냈다. 최초의 한국영화 광고다. 광고에는 "경성에서 촬영된 대연쇄극,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의 활동연쇄극이 없어서 항상 유감히 여기던 바, 본인이 5천원의 거액을 내어 경성 내외 좋은 곳에서 촬영하여 오는 27일부터 단성사에서 봉절(封切; 개봉)하고 대대적으로 상장하오니, 우리 애활가(愛活家; 영화애호가) 제씨(諸氏)는 한번 보실 만한 것이올시다"라는 글이 담겨있다.

'의리적 구토'는 김도산이 극본을 쓰고 연출까지 한 한국 최초의 영화이자 연쇄극이다. 당시 한국에 소개된 영화는 겨우 3~4분짜리였고, 한국인이 만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영화는 달랐다. 한국인의 자본과 인력이 주축이 되어 제작되었다. 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입장료는 특등석 1원 50전, 1등석 1원, 2등석 60전, 3등석 40전이었다. 당시 설렁탕 한 그릇이 10전이었으니 가격이 꽤 비싼 셈이다. 그럼에도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29일자 매일신보에 '단성사의 초일(初日; 첫날), 관객이 물밀 듯이 들어와'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27일 초저녁부터 조수(潮水)같이 밀리는 관객 남녀는 삽시간에 아래층은 물론이고 빽빽이 차서 만원(滿員)의 패(牌)를 달고 표까지 팔지 못한 대성황이었더라. 그런데 제일 번화한 것은 각 권번(券番)의 기생이 온 것이 무려 200여 명이나 되어 더욱 이채(異彩)를 띠었더라. 남대문에서 경성 전시(全市)의 모양을 비침에 관객은 박수가 야단이었고, 그 뒤는 정말 신파 사진과 배우의 실연 등이 있어서 처음 보는 조선활동사진이므로 모두 취한 듯이 흥미있게 보아 전에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더라."

당시 단성사는 극장 역할 뿐 아니라 공공장소 역할도 담당해 모금회, 연주회, 강연회도 자주 열렸다. 1920년 7월 12일자 조선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경성부 단성사에서는 이번 한강 수해 이재민에 대하여 13일 밤부터 구제연주회(救濟演奏會)를 개최하여 수입의 전부를 이재민에게 보내일 터이라더라."

1920년 11월 11일자 매일신보에는 "시내 단성사에서 음악연주회를 개최할 터이라는데, 당일은 경성 내에서 명성이 자자한 김영환(金永煥), 홍영후(洪永厚), 최동준(崔東俊), 김형준(金亨俊), 박태원(朴泰元) 등 외에, 경성악대에서도 단원 전부가 출연할 터이라 하며, 이번에는 입장료를 싸게 하여 일반 학생과 부인네들이 다수히 내청(來聽)하기를 희망한다는데, 입장권은 종로 광익서관과 당일 회장되는 단성사에서 발매한다더라."

이후 단성사에서 상영된 영화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26년 10월 1일 개봉된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의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효시로 찬사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항일민족정신을 높이고 그것을 전통 민요인 '아리랑'과 연결·승화시킨 점에서 개봉이 되자 사상 유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번안 모방물, 개화기 신파물에서 벗어나 민족영화 창조의 전통을 쌓게 만든 영화가 '아리랑'이었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나운규는 배우, 영화제작자로 나서기 전에 독립운동을 했었다. 1921년 3월 16일지 매일신보에 '청회(청진-회령)선 파괴의 음모 사건 판결'이란 제목을 달고 그의 이야기가 나온다. "회령 '붉은 잉크' 사건은, 그후 지방법원 회령지청에서 예심이 착착 진행되어, 지난 2일 공판을 개정하여 각각 아래와 같이 판결 언도하였다. △회령군 회령면 2동 399번지, 징역 2년, 나운규(20) △회령군 회령면 2동 26번지, 징역 2년 6개월, 윤봉춘(尹逢春·20) △회령군 회령면 4동 139번지, 징역 1년, 엄일선(嚴逸善·20)."

당시 신문에는 영화 제작의 열악한 상황을 전하는 기사도 보인다. 1926년 2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장한몽(長恨夢) 촬영 중 대목(大木) 도괴(倒壞; 넘어짐)로 중상(重傷)'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다. "계림영화협회에서는 소설 장한몽을 활동사진으로 만들기 위하여 불난 장면을 촬영하다가 큰 나무가 넘어져 주삼선(朱三線)과 나운규 두 사람은 치료 약 2개월의 중상을 당하고 지금 입원 치료 중이라더라."

윤여정 씨의 아카데미상 수상까지 지난 100년의 세월 속에 그 얼마나 많은 분들의 피와 땀이 있었겠는가? 50년의 영화 인생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윤여정 배우가 있었겠는가? 윤 씨의 수상을 다시한번 축하하면서 동시에 이 땅의 수많은 배우와 제작진들의 노고에도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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