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중년의 생존 키트 '삶의 의미'

김은형 2021. 5. 12.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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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너도 늙는다]너도 늙는다
중년 여성이 어머니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 딸의 출산 등을 겪으면서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다가오는 것들>(2016) 스틸컷.

김은형

나이듦에 대한 책을 읽다 보면 진도가 멈춰지는 지점이 있었다. 공허감이 엄습하는 중년의 위기를 넘기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서는 의미있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올 때다. 노화에 대한 조언을 하는 책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든 삶의 의미에 대한 챕터가 꼭 들어 있다. 돈이나 명예 같은 젊은 시절의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 사랑, 헌신, 나눔 등의 내적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삐딱해졌다. 나이가 들면 사회적 효용가치는 떨어지고 잉여력만 급상승하니 자원봉사만 하고 살라는 말인가? 정신승리를 잘도 갖다 붙이네. 아이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노년이 되어 유치원 교실에서 가식 넘치는 인자한 얼굴로 동화책을 읽어주는 모습이 떠오르며 코웃음이 나왔다. 요새는 정치인도 이런 짓은 안 하겠어.

그러다가 책들이 말하는 ‘삶의 의미’가 나이 들었으니 마음 좀 곱게 쓰라는 정도의 훈수가 아니라 중노년의 생존 키트임을 지난해 뼈저리게 이해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사람 열 중 넷이 비슷한 처지의 고통을 겪었을 집값 문제가 계기였다.

나 역시 ‘집값 상승에 신음하는 무주택자들’이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에 사례로 쓰기 딱 좋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치솟는 집값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부동산 정책이 나올 때마다 기대와 좌절을 반복하면서 내면까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불안과 우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고통은 단순하지 않았다. 정부의 실책이나 탐욕스러운 투기꾼들을 비난하고 해결책을 촉구하는 게 전부였으면 좋겠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건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내가 저질렀던 무수한 (결과적으로) 어리석었던 판단들, 순진했던 믿음들이 하나하나 뾰족한 바늘 끝이 되어 돌아왔다. 차곡차곡 쌓이는 자책감 위에는 자기혐오라는 한층의 고통이 추가됐다. 만져보지도 못한 돈의 노예가 되어 정부 발표, 기사 하나에 일희일비하면서 투전판에 휘둘리고 있는 꼴로 보이는 스스로가 환멸스러웠다.

이런 마음 상태는 일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셋만 모이면 시작되는 집값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료들뿐 아니라 친구들과도 대화를 피하기 시작했다. 더 심각한 건 가족이었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심리 상태일 남편과 작은 일에도 성냥불 타들어가듯 화르륵 다툼이 번졌다. 살얼음판 같은 집안 분위기에서 아이에게 불안이 전염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의 잔소리 한마디에 극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아이의 모습은 바로 나의 거울이었다. 햇빛이 쨍하던 지난가을 어느 날 출근길에 남편한테서 문자 한통을 받았다. “이런 상태로는 더 이상 못 견디겠어. 헤어지자.”

그 순간 ‘삶의 의미’라는 게 갑자기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도대체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무얼 위해서 살고 있는 거지? 아파트값이 뭐길래 내 인생을 망가뜨리게 내버려두는 거지? 괴로움에 허덕이다 가족도 건강도 잃고 나면 나에게 남는 건 뭘까. 죽지 않기 위해,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산소호흡기가 ‘삶의 의미’라는 걸 그때 문득 깨달았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회고록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삶의 의미를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책이다. 어제까지 함께 이야기하고 밥 먹던 옆사람, 앞사람이 오늘 죽어 나가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거창한 대의나 목표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틋함, 짐짝보다 못한 상태로 실려 가면서 봤던 저녁놀의 아름다움, 주변의 고통을 돌아보거나 수용소 밖에서 좋아하던 일을 가느다랗게라도 이어가 보려는 삶의 의미의 재구성이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하게 했고 그로 인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게 프랭클의 회고다.

나를 힘들게 만든 것 중 하나는 이제 재기가 쉽지 않은 나이라는 것이었다. 젊은 나이면 ‘영끌’을 해서라도 어떻게 모험을 하든, 사고를 쳐볼 수 있겠지만, 직장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알 수 없는 중년이 되면 이런 시도가 쉽지 않다. 그만큼 기회도 사라지고 이제는 가라앉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나이 들며 더 많은 재산을 증식하고 사회적 성공을 하는 삶도 있지만 중년은 그게 본인의 역량과 의지를 상당 부분 벗어난 우연과 행운의 역사라는 걸 깨닫는 나이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일이 꼬이고 기회를 놓쳤더라도 그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일 뿐이다. (다수의 고통을 야기하는 잘못된 정책이나 도를 넘는 탐욕에 대한 비판은 별개의 문제다.) 사실 인생은 살아갈수록 꼬이는 일만 늘어간다. 딸린 식구들이 생기니 식구들까지 꼬여간다. 꽈배기처럼 이어지는 인생에서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삶의 의미를 찾아 우연과 운에 흔들리는 삶의 빈 공간들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일일 것이다.

문화기획에디터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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