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무수한 세계,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 / 조문영

한겨레 2021. 5. 1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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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조문영ㅣ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코로나19 직전에 어머니와 함께 뉴질랜드에 다녀왔다. 양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풍경에 처음엔 바라던 고요를 찾았다며 설레발을 쳤다. 그런데 가도 가도 양이었다. 네다섯 시간은 족히 달렸는데 여전히 양만 보였다. 버스가 잠시 정차했을 때 매점에서 지역신문을 살폈다. 그날의 톱뉴스도 양이었다. 어느 동네 양이 세쌍둥이를 낳았다는 기사가 큼지막이 실렸다. 그때 생각을 했다. 이 신문의 구독자가 사는 세계와 내가 사는 세계는 같은 세계일까?

조사 대상인 ‘현지’의 스케일에 고민해온 인류학자들에게 이 질문은 낯설지 않다. 개인이 가족, 친족, 지역으로 확장되면서 국민국가에 이르고, 국가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는 생각은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하나의 세계 아래 여러 문화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계 자체가 복수임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일례로 메릴린 스트래선은 ‘전체’를 가정하는 사고가 서구 중심의 위계질서를 재생산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전체의 반”을 “한 쌍 중 하나”로 만드는 사회적인 논리로서 부분성 개념을 제안한 바 있다. 세계도, 지식도 결코 자기완결적일 수 없으며, 현전하는 것은 총합도 파편도 아닌 “부분적인 연결들”뿐이다.

인류학자들은 흔히 오지라 불리는 곳을 연구하면서 세계의 복수성과 부분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켰지만, 한국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다. 점점 내가 사는 나라가 법과 정부, 의회가 구심성을 갖고 민의를 수렴하거나 조정하는 대륙이 아니라, 크고 작은 섬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망망대해처럼 보인다.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트위터, 페이스북, 갤러리, 여초·남초 커뮤니티까지 다양한 세계들이 난립하고 있다.

복수의 세계들은 평화롭게 공존하지 않는다. 우리 편을 공고히 하고 상대를 압살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전투를 치르는 게 다반사다. ‘여성’ ‘남성’ ‘청년’ ‘국민’ 같은 어휘를 선점해 우리 편의 권위를 다지고, 특정 혐오 표현을 확산시키면서 상대에게 재갈을 물리는 작업이 치열하다. 상대를 적으로 삼고 전투적인 게이머로 거듭나지 않으면 필패할 운명이다. 주류 일간지에서 전통적인 수문장 역할을 해온 엘리트 중년 남성들이 예전만큼 섬들의 대변자로 군림하지 못하는 건 반갑지만, 우리 시대의 주요 의제들이 ‘좋아요’와 ‘팔로어’, 댓글과 국민청원, 신상털이와 조리돌림에 빈번히 휘둘리는 상황은 우려스럽다. 이 상황 자체가 법, 제도, 교육이 불공정과 불평등에 맞서는 데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돌아보게 하지만, 자신들만의 은어와 규칙으로 성벽을 쌓은 채 전개되는 세계들의 싸움은 여성과 성소수자를 향한 오랜 성차별과 성폭력의 역사를 숙고할 계기를 터주기는커녕 애초의 바람이 무엇이었는지 곧잘 잊게 만든다.

소셜미디어 활동이 뜸한 나는 윤지선 교수가 발표한 논문이나 지에스(GS)25의 캠핑 이벤트 포스터를 둘러싼 이른바 ‘남성혐오’ 논란을 뒤늦게 접했다. 학술지의 세계도 더는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커뮤니티로 남을 수 없단 걸 실감했지만, 외부인이 교수의 온라인 강의에 무단 접속해 욕설과 음란물을 끼얹는 상황에 두려움을 느꼈다. 어떤 남성은 각종 홍보물에서 ‘메갈리아’라는 (이미 사라진) 여초 사이트가 한국 남성을 비하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손 모양 디자인을 찾아낸다고 난리인데, 어떤 남성은 나에게 ‘메갈’이 뭔지 소심하게 묻는다. 기업이 서둘러 광고를 내리고 사과를 연발하는 사이, 모든 생명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실천으로서의 페미니즘은 ‘페미’란 금기어로 둔갑하고, ‘메갈’과 동의어가 되었다. 게으른 기자들이 인터넷에서 자극적인 전투만 뒤지고 몇 개의 섬을 연결해 ‘젠더 갈등’ 프레임을 짜는 사이, 페미니즘을 안전, 차별금지, 돌봄, 생태, 기본소득, 기후변화 등에 대한 너른 관심으로 확장해온 세계는 시야에서 가려졌다.

전체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복수의 세계에 주목하자는 제안은 세상 읽기를 더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이는 모두가 저마다의 세계로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무수한 세계들이 어떻게 관계하고 있으며 관계할 것인가”를 새롭게 고민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부분적인 연결들>, 스트래선). 정치가 표심을 좇아, 기업이 매출을 좇아 페미니즘의 효용을 셈할 때, 어떤 세계의 사람들은 분명 페미니즘이란 명명 아래 바랐던 관계를 찾아 새롭게 그물코를 꿰고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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