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 지하실로 분리.."기본권 과도제한"

CBS노컷뉴스 이은지 기자 2021. 5. 12. 12: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하공간서 근무하다 3개월 뒤 해임.."인격권·건강권 침해"
"마땅한 단독공간 없어..연이은 휴가로 근무 제대로 안해"
인권위 "피해자 보호취지 벗어난 징벌, 모멸감 주는 행위"
그래픽=고경민 기자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로 지목된 직원을 피해자 보호 목적으로 분리하더라도, 근무공간을 지나치게 열악한 장소로 지정하는 것은 헌법 상 기본권 침해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판단이 나왔다.

인권위는 12일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행위자의 근무장소를 바꾸더라도 가해자의 인격권과 건강권을 고려해 분리조치를 시행해야 한다고 피진정학교 이사장에게 권고했다고 밝혔다.

앞서 한 학교의 사무직원으로 근무했던 A씨는 지난해 3월 20일 지하공간에서 근무하라는 학교 측의 지시를 받았다. 학교 측은 A씨가 같은 달 10일 다른 직원에게 언성을 높이고, 폭언 및 삿대질을 했다는 보고를 받고 관련조사를 진행한 뒤 A씨에게 근무공간 이전과 시말서 제출을 명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후 세 달 뒤 해임된 A씨는 "(학교 측이) 근무장소로 적합하지 않은 곳으로 근무지를 변경해 인격권과 건강권이 침해됐고, 시말서 작성 관련공문을 다른 직원들에게 공람시켜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고 주장하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이에 학교 측은 A씨가 근무했던 공간은 과거 학교버스 운전기사들의 휴게실로 쓰였던 곳이라며 "더 나은 근무환경을 제공하고 싶었지만 A씨가 달리 단독으로 사용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고 반박했다. 또 A씨가 근무지를 옮긴 후 연가와 병가를 자주 사용해 해당장소에서 제대로 근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하실에 방치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해명했다.

연합뉴스
인권위는 학교 측의 자체조사를 통해 A씨가 행정실 다수 직원을 상대로 업무를 전가하고 욕설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는 결과는 인정했다. 다만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 헌법 제10조를 들어 "여기서 유래한 인격권은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인격적 이익의 향유를 내용으로 하는 권리이고, 건강권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기초가 되며 국가의 보호의무가 인정되는 기본권"이라고 짚었다.

같은 맥락에서 현장조사 결과, 학교 측이 A씨에게 제공한 본관동 지하 1층 사무실은 이같은 권리들을 보장받기에 적절하지 못한 공간이라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해당 사무실은 자연채광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기순환에 어려움이 있으며 출입구 근처 제초기를 보관하고 있는 창고에서 심한 기름냄새가 나는 등 사무공간으로서 적절하지 못하다는 점을 확인했다"며 "피진정학교의 감독기관인 (관할) 교육감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피진정학교장에게 해당 사무직원의 근무장소 재지정을 검토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피진정인은 이같은 권고에도 불구하고 진정인이 별건으로 해임될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사무공간을 조정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며 "단순히 피해근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진정인의 항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스마트이미지 제공
인권위는 직장 내 괴롭힘 사실을 인지한 사용자는 즉각 가해자-피해자 분리조치에 들어가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가해자에 대한 징계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해자의 건강을 해칠 정도로 낙후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피해자 보호'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인권위는 "근무장소의 변경조치는 피해자 보호조치를 벗어나 징벌에 준하는 조치 또는 행위자에게 모멸감을 줄 목적으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며 "피진정인이 진정인에게 제공한 근무장소가 사무환경 측면에서 매우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무공간이 지상층에 배치된 것과 달리 지하 1층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진정인에게 심리적 모멸감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진정인은 그 전까지는 병가 사용이 많지 않았는데 변경조치 이후 해임 시까지 두통과 어지럼증 등을 호소하며 병가·병조퇴를 지속적으로 신청했고, 관리자는 진정인의 근무상황을 확인하고 결재하는 과정에서 진정인의 건강상 고충을 충분히 인지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인권위는 시말서 작성 관련 공문에 대해선 "피진정인이 공람자로 지정한 사람은 진정인을 관리·감독할 지위에 있는 학교장과 교감 외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당사자로 사용자인 피진정인이 관련사건을 확인하고 취한 조치에 대해 알아야 할 정당한 이익이 있는 자인 점, 관계자 외 열람을 제한토록 비공개 처리된 점" 등을 들어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 기자와 카톡 채팅하기
▶ 노컷뉴스 영상 구독하기

[CBS노컷뉴스 이은지 기자] leunj@cbs.co.kr

Copyright © 노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