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주유소에 기름이 동났다..'다크사이드'의 송유관 공격에 패닉

워싱턴/김진명 특파원 2021. 5. 12.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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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의 워싱턴 리얼타임]

11일 밤 11시40분(현지 시각) 미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한 주유소는 주유를 하려는 차량들로 꽉 차있었다. 주유기 8대가 풀가동 중이었고 옆의 주차장 공간에서 주유할 순서를 기다리는 차량도 보였다. 자정이 다 된 시각이지만 주유소를 찾는 차량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주유를 하고 있던 ‘메릴린’이란 여성은 “저녁 뉴스를 보고 집에 있는 두 대의 차량을 모두 끌고 나왔다”고 말했다. “기름값도 오르고 있고 기름이 동날지도 모른다고 하잖아요? 그래도 이 밤중에 다들 나와서 주유를 하다니 정말 정상이 아니에요(crazy).”

‘어둠의 세력이 주도한 해킹 공격에 에너지망이 무너지고 주유소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선다.’ 공상 과학 영화에 나왔을 법한 시나리오가 미국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동유럽에 기반을 둔 해킹 조직 ‘다크사이드’가 지난 7일 미 동부의 송유관 업체 ‘콜로니얼 파이프라인’에 랜섬웨어 공격을 가해 운영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다크사이드’는 작년에만 서구 기업 80곳에 사이버 공격을 가해 수백 억 달러의 손해를 입혔다고 한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롯의 대형마트 '코스트코' 주유소에 11일(현지 시각)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미 동부 석유 공급의 45%를 책임 지는 '콜로니얼 파이프라인'이 지난 7일 동유럽 해킹그룹 '다크사이드'의 랜섬웨어 공격을 받아 송유관 운영을 중단한 뒤 3~4일 만에 버지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다른 동부 주에서도 주유난이 시작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콜로니얼 파이프라인의 송유관은 텍사스를 출발해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메릴랜드를 지나 뉴욕까지 8850㎞에 이른다. 미 동부 전체 석유 공급의 45%를 책임지고 있으며, 5000만명 이상의 인구가 여기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자가 운전이 기본인 미국에서 이 혈관이 막히자, 나흘 만에 동부 각 주에서 주유난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유를 하시려면 줄 끝을 찾으셔야 해요. 전 그게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요.”

플로리다주 탤러해시에 사는 앨리샤 디바인은 이날 오전 대형마트 코스트코에 있는 주유소에 주유를 하러 갔다가 직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미 앞서 들른 네 곳의 주유소에서 ‘기름이 떨어졌다’는 말을 들은 뒤였다. 다섯 번째 들른 코스트코 주유소에 처음 기름이 있었지만, 이미 수많은 차들이 코스트코 주변 도로를 따라 길고 긴 줄을 서있었다. 디바인은 트위터에 영상을 공유하며 “이 줄은 미쳤다(insane)”고 적었다

주유소를 안내해주는 ‘가스버디 닷컴’에 따르면 11일 버지니아주에 있는 주유소 3900곳 중 7.7%가 기름이 없다고 보고했고,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주유소 5400곳 중 8.5%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노스 캐롤라이나 애슈빌에 사는 마틴 브로스만은 주유소에 가득 찬 차량 동영상을 공유하며 “어떤 주유기에는 특정 종류의 기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버지니아 주도 리치먼드 근방의 주유소마다 미리 주유를 해놓으려는 차량이 길게 늘어섰다. 유류를 저장해 놓으려고 석유통을 들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애틀랜타 조지아의 한 주유소에 주유를 하려는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AFP 연합뉴스

콜로니얼 파이프라인 측은 늦어도 이번 주말까지는 송유관 운영을 정상화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소비자들의 불안 심리가 일종의 ‘사재기 주유’로 이어지면서 며칠 간 주유난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인들은 지난해 코로나를 겪으면서 집집마다 휴지와 타이레놀 같은 비상약을 사놓는 습관이 생겼다. 송유관에 대한 사이버 공격이 이런 심리를 건들여 새로운 ‘패닉 바잉’을 유발한 측면이 있다.

제니퍼 그랜홈 에너지부 장관은 이날 백악관 브리핑에서 “주말까지는 송유관이 가동을 재개할 것”이라며 “코로나 대유행 초기에 휴지를 사들였던 것이 결국 필요 없는 일이었던 것처럼 연료를 쟁여둘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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