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태종의 노비개혁

기자 2021. 5. 1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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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3대 왕 태종은 폭군으로 인식된다.

그렇지만 태종은 조선 초기 불안했던 왕조를 굳건히 했던 개혁 군주였다.

태종의 노비 개혁은 태조의 토지 개혁(정전제)과 함께 조선 초기 양대 개혁이란 평가도 있다.

조선의 노비제도는 순조 1년(1801년) 공노비 해방 공표에 이어 고종 31년(1894년) 갑오개혁 때 가서야 완전히 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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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수 논설위원

조선 3대 왕 태종은 폭군으로 인식된다. 고려말 충신 정몽주를 척살했고,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렇지만 태종은 조선 초기 불안했던 왕조를 굳건히 했던 개혁 군주였다. 노비 개혁이 대표적이다. 당시 노비 신분을 정하던 종모법은 부모 한쪽이 천인이면 그 자녀는 무조건 천인으로 규정했다. 더구나 노비 신분은 세습됐다. 태종은 종모법을 종부법으로 고쳐, 아버지가 양반이면 어머니가 노예여도 면천(免賤)을 허용해 양인으로 신분을 높였다.

태종 14년(1414년) 예조판서 황희가 “아버지가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 돼야 하니 종부법이 옳다”고 보고하자, 태종은 그해 6월 종부법으로 개정했다. 이 조치는 양반의 사적 재산인 노비를 줄여 양반층을 견제하는 동시에 노비와 달리 납세·군역 의무가 있는 양인을 늘림으로써 국고·병력 확충을 꾀한 것이다. 인권 향상까지 1석 4조였다. 태종의 노비 개혁은 태조의 토지 개혁(정전제)과 함께 조선 초기 양대 개혁이란 평가도 있다.

그런데 ‘성군’ 세종은 다시 종모법으로 환원했다. 양반들은 호랑이 같던 태종이 사망하자(세종 4년), 종부법은 신분제 기반을 허문다며 끈질기게 폐지를 요구했다. 세종은 처음엔 거부했지만 결국 재위 14년(1432년) 3월 종모법으로 돌아갔다. 세종 역시 양반이 중심인 성리학적 사고와 시대적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노비는 급증했고 양인은 줄어 사대부의 재산은 늘었지만, 세금·병력 자원은 줄어 선조 임진왜란 땐 정규 군대가 거의 없어지기에 이르렀다. 종부법을 지켰다면 홍길동전에서 얼자(孼子) 신분인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고 했던 그 유명한 한탄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조선의 노비제도는 순조 1년(1801년) 공노비 해방 공표에 이어 고종 31년(1894년) 갑오개혁 때 가서야 완전히 폐지된다. 태종의 혜안이 놀랍다. 사실 태종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게 과거(문과)에 급제한 인재였다. 역사 속 인물은 제대로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왜곡이 심한 탓이다. 태종은 재평가받을 만하다. 그가 처가 쪽 일족과 세종의 장인 등 외척을 척결한 것은 폭군의 만행이 아니라, 세종의 평탄한 치세를 준비해 준 것이란 평가도 있다. 편견이 없어야 실상이 보인다. 역사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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