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의 플라이룸 (4)'자산어보'와 이국일성(伊國日盛)]

2021. 5. 12.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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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20세기 초 조선 후기 사상사 연구에서 실학이 핵심 주제로 떠오른 이후, 한국사에서 실학은 서구의 과학기술과 유사한 과학적 학풍으로 취급됐다. 하지만 과학사 연구자들은 한국사 연구자들처럼 실학을 대단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임종태는 ‘과학사 학계는 왜 실학을 저평가해 왔는가?’라는 논문에서 과학사학계 1세대인 전상운, 박성래, 김영식의 관점을 소개한다. 전상운은 실학자들이 외부에서 유입된 과학을 주체적으로 소화하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박성래는 실학자들이 보여준 서구 과학기술 지식은 동시대 일본이나 중국의 수준에 비해 현격히 낮았음을 지적한다. 19세기 말 “서구의 전문적·실용적 기술을 배우기 위한 ‘영선사’ 계획은 실패”하고, 근대 문물의 개관에만 목적을 둔 ‘신사유람단’만 성공했다는 사실은 “당시 한국 엘리트들이 서구 과학에 대한 교양적 수준의 소양만을 갖게 되었을 뿐 전문 과학의 수용에는 실패”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실학의 실패, 그리고 〈자산어보〉

가장 급진적으로 실학의 실패를 지적하는 학자는 김영식이다. 그는 한국사에서 추켜세우는 실학자들이 “여전히 주자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전근대 사유의 범위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중국 과학의 압도적인 영향하에 있었고, 근대 이후 미국의 영향력에 압도된 한국의 과학은 언제나 중심부 과학의 주변부로서만 존재해왔음을 지적한다. 특히 18세기 중반 서구 천문학과 수학에 가장 깊은 소양을 보였다고 알려진 홍대용조차 관측과 계산을 통한 연구를 수행한 과학자가 아니라 “서구 과학의 대체적 특징을 파악하고 지구설 등 서구 과학의 지식이 지닌 세계관적 함의에 천착했던” ‘과학사상가’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말한다. 즉 19세기 말 이래 서구 과학기술을 국가의 부강을 위해 진흥해야 한다는 인식은 널리 확산됐지만, 정작 조선과 대한제국 그리고 식민지 시대에도 과학기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하는 과학기술자 집단의 양성에는 처절히 실패한 역사가 한국 과학사의 비극 혹은 “전문화 없는 아마추어적인 근대 과학기술의 수용”이었던 셈이다.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했다.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물고기를 연구하며 책을 쓰던 이야기다. 과학사가들은 조선 후기의 실학이 서구의 과학기술에 대한 수용이라는 관점에서도 근대를 여는 학문이라는 관점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역사학계는 ‘실학시대’라는 유사근대를 조선에서 찾기 위해 조선 후기의 개혁사상가들을 실학자로 재탄생시켰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산 정약용이다. 1922년 장지연은 〈조선유교연원〉에서 유형원, 정약용, 박지원을 ‘경제가’로 분류하고 그들의 학풍을 실학으로 계보화한다. 정약전·정약용 형제가 서구에서 기원한 ‘서학’에 심취해 귀양을 간 건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서학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천주교였다. 다산을 실학자로 만드는 작업에 한국사의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 실학의 계보는 해방공간에 새롭게 등장한 과학기술자 집단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조선의 실학은 우리가 아는 과학기술과 아무런 접점도 갖지 않는다. 반대로 일본에선 실학의 개념이 빠르게 서양과학으로 전이됐다.

한국 과학기술자집단은 조선과 아무런 연속성 없는 해방공간에 내동댕이치듯 등장했고, 그마저 국대안 파동으로 대부분 월북하거나 도미해야만 했다. 전쟁 이후 제대로 된 연구공간조차 없던 남한에서 과학자들은 대학에서 강의하는 정도로 연명했고, 이후 원자력연구소의 설립과 더불어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베트남 파병으로 얻어낸 KIST를 통해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 험난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한국 과학기술계는 국가의 자립적 기반을 마련했고, 한국을 선진국의 반열에 올렸다.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권이 등장했을 때, 과학기술계도 큰 희망을 걸었다. 정치적 적폐를 걷어내고 등장한 최초의 정권에서 과학기술도 새로운 모습으로 재도약할 것이라는 기대가 과학기술자 모두에게 조금은 있었다.

인문학 정부의 실패, 그리고 이국일성

새로운 과학기술정통부 장관후보가 발표됐다. 임혜숙 후보자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이 된 지 불과 3개월 만에 그 막중한 임무를 내팽개치고 장관후보자를 선택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자리는 또다시 공석이 됐다. 문재인 정부는 과학기술계 인사에서 여성을 중용했다. 훌륭한 철학이다. 하지만 왠지 여성 30% 내각 공약에 과학기술계가 이용된 것 같다는 의혹을 감추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의 과학기술계 실세라는 문미옥 전 과기정통부 차관은 과학기술계에서 탁월한 업적 없이 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고, 그 1년 후 바로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이 되더니, 여러 논란으로 문제가 되자 과기정통부 차관으로 임명됐다가 국회의원 선거에 낙마하자 이번엔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원장에 선임됐다. 과학기술계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다.

수학자 박경미 교수는 최근에 청와대 대변인에 임명됐는데,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찬미하는 ‘월광 소나타’ 연주로 유명한 인물이다. 논문 표절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그가 어떻게 민주당 비례대표 1번이 됐는지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문미옥 전 차관 이후, 과학기술보좌관 자리는 이공주·박수경 등 여성으로만 임명됐는데 박수경 교수는 카이스트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선언을 주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방역기획관에 임명된 기모란 교수의 남편은 21대 총선에 출마했던 더불어민주당 양산갑 지역위원장 이재영씨다. 박정희 이래 정치에 종속된 과학은 여전히 그 굴레를 벗지 못했다.

1884년 한성순보에는 ‘이국일성(伊國日盛)’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다른 국가들은 나날이 발전한다’는 뜻으로 137년 전 쓰인 이 글은 서양의 문명을 능가하기 위해 서학을 이단으로 여기지 말 것과 서양 과학기술이 추구하는 목표가 오래전 동양의 격치를 통한 학문적 방법과 일치함을 말하고 있다.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목도한 필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아 전일에 실학을 일삼지 않고 허문을 헛되이 숭상하여 해야 할 바를 모르고 착오하여 모욕을 받거나 병탄되었다. 동양의 물산과 인구가 많음에도 구주보다 부강하지 못해 모욕을 당한 것은 어째서인가. 저들은 실학을 하고 우리는 허문을 숭상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실사구시하여 일신하면 수십 년 후에는 반드시 서국을 능가할 것이다. 이른바 실학이란 격치의 한 단서이다.”

김우재는 한때 초파리로, 지금은 꿀벌로 세계정복을 꿈꾸는 과학자다. 동물의 행동을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며, 사회성 행동을 유전학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한다. 연구 외에도 과학의 사회적 사용에 관심이 많으며 〈플라이룸〉 등의 책을 저술했다. 현재 하얼빈공대 생명과학연구센터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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