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아닌 판사가 판단하는 법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 (18)]

2021. 5. 12.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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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평소 알고 지내는 의사에게 질문을 받았다. “의사가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에서 일하려면 전공을 선택해 박사 학위가 있어야 하는데, 판사는 그 많은 재판을 해낼 수 있나요. 특허나 조세 전문변호사처럼 전문판사가 없어서 재판을 믿지 못하는 것 아닌가요.” 학사 학위밖에 없어 당황했지만 이렇게 답변했다. “재판은 민사·형사·행정·가사재판으로 나뉘고, 전문분야를 담당하는 전문재판부가 수십개 있습니다. 다만 의사처럼 평생 하나의 전문분야만 하는 게 아니고, 몇년마다 바꾸지요.” 그러자 다시 물었다. “바꾸는 이유가 뭐죠. 한 판사가 그 많은 전문분야를 어떻게 알아서 판단하나요.”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우리나라에서 특허법원과 가정법원, 서울행정법원을 제외한 모든 법원의 판사는 다양한 소송사건을 맡는다. 일반사건도 판사의 법적 지식과 경험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부동산의 시가나 권리금을 정해야 하는 사건, 토지의 경계를 확정지어야 하는 사건, 문서에 찍힌 필적이나 인영을 확인해야 하는 사건, 교통·산재 사고로 인한 신체 노동능력 상실률을 정해야 하는 사건, 건설공사에서 기성고나 하자의 정도를 정해야 하는 사건이 대표적이다. 특허 등 지적재산권 분쟁에 관한 사건, 컴퓨터와 디지털 기록 매체에 남겨진 증거를 다투는 사건, 의료사고나 환경사고의 원인을 규명하는 사건 등 전문사건에서는 전문가 도움이 꼭 필요하다. 이렇게 재판하면서 판사가 전문가 도움을 받는 절차가 ‘감정’이다. ‘감식’은 수사기관이 수사하면서 전문가에게 맡기는 절차(디지털 포렌식이 대표적임)이고, ‘감정평가’는 부동산 등 재화의 경제적 가치를 평가하는 절차인데 감정에 속한다.

전문사건에서는 전문가 도움 꼭 필요

민사재판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흔히 생각하듯 법률이나 판례가 아니고 전관 변호사도 아니다. 선례가 없거나 법적 쟁점이 난마처럼 얽힌 사건이 아니라면, 누가 주장하는 사실관계가 맞느냐로 승부가 갈린다. 보통 계약서 등 서증이 어떻게 돼 있고 해석되는지, 어떤 증언을 믿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때 판사는 축적한 경험과 스킬에 따라 판단하면 된다. 반면 과학기술 등 전문영역 사건에서는 전문가 도움이 필요하고, 그 의견이 소송 승패에 영향을 미친다. 선진국에서도 교통사고로 인한 손해배상 사건은 감정의사의 노동능력상실률 판정이 절대적이므로 ‘하얀 가운 재판관’에 의한 재판이라 비판받는다. 감정은 판사의 인식·판단능력을 보충하기 위해 법원이 위촉한 전문가(감정인)가 전문적 경험과 지식을 전제사실에 적용해 얻은 판단을 보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소송에서 변호사는 그 분야를 잘 모른다는 이유로 감정결과를 분석하는 데 소홀하기 쉽다. 판사는 꼼꼼히 검토하지 않은 채 감정인만 믿고 감정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감정인은 판사가 알아서 검토할 것이라 생각하며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 상황을 잘 모르는 당사자는 결과를 그대로 수긍하거나 무조건 비난할 수밖에 없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 전문영역 재판에 대한 신뢰는 의심받는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소송당사자와 변호사 시각에서 보면, 일단 법원이 지정한 감정인이 공정하고 전문성을 갖추었는지 검토한다. 법원은 대부분 전문가단체에서 명단을 받아 전산시스템으로 감정인을 선정하지만, 보험회사의 자문의가 신체감정인까지 맡는 등 부적절한 경우가 있다. 명단이 없는 특수한 전문영역은 유능한 전문가를 추천하면서 상대방이 추천한 전문가 능력과 공정성 여부를 확인한다. 감정신청서에 적는 전제사실은 법원에 제출된 증거로 인정돼야 한다. 상대방이 증거도 없이 일방적으로 적었는지 살피고 지적한다. 감정인이 제출한 감정서에도 전제사실에 오류가 없는지 대조하고, 필요한 경우 증거를 추가로 내며 전제사실을 정정해서 사실조회나 보완감정을 요청한다. 감정서를 교부받은 변호사는 의뢰인에게도 사본을 주고, 그 분야 다른 전문가에게 확인해 감정절차와 결과에 잘못이나 편견이 있는지 검토한다. 보완할 수 없을 정도 오류가 발견되면 재감정을 신청한다. 이때 법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의뢰해 얻은 사감정으로 법원 감정의 신빙성을 탄핵할 수 있다. 어쨌든 법률전문가는 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감정서를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감정인이 법정에 출석해 변호사와 질문과 답변,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감정인 신문이 제일 중요하다. 당사자가 보는 앞에서 감정인 신문이 활성화되고 내실화되면 전문재판의 불신은 많이 해소될 것이다. 판사는 감정서를 어떻게 평가해 결론을 내렸는지 판결문에 자세히 적어야 한다. 당사자가 승복여부를 결정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문재판의 불신 해소하려면

2021년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업체 대표와 임직원의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가습기 살균제의 주요성분(CMIT와 MIT)이 폐질환이나 천식을 유발했다는 점에 대해 충분히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피해를 신고한 사람이 1000명을 넘고 많은 사람이 사망했기 때문에 판결에 대한 반발이 거세다. 법정에 나와 ‘전문가 증인(감정인과 비슷함)’으로 증언한 과학자들은 ‘재판부가 증언과 연구를 문맥과 달리 취사선택했다. 과학자로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 뿐인데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증거로 인용됐다’고 비판했다. 언론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노출재현 실험과 세포독성 실험, 흡입독성 실험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험절차와 결과는 적절하고 합리적인지, 실험결과에 비추어 법적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는지가 문제의 핵심이다.

전문가 도움을 받는 방법은 감정 이외에 특허재판에서 기술심리관과 전문재판에서 전문심리위원이 있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앎의 첫걸음이므로, 판사는 거리낌 없이 활용해야 한다. 평생 법관인 판사는 관심 분야를 공부해 전문법관으로서 능력과 자질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평생 한두개 전문분야만 담당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특정 분야만 계속 재판하면 판사에게 필요한 지혜를 갖추기 어렵고, 당해 업계의 이해관계에 포획돼 공정함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이 바라는 판사는 특정 법 분야만 아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다. 따뜻하지만 예리한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고 경험이 풍부한 ‘제너럴리스트’로서, 전문분야는 전문가 도움을 받아 판단하는 재판관일 것이다. 하지만 변호사의 전문성은 제고되고 전문 변호사제도는 더 많이 시행돼야 한다. 한사람의 변호사가 많은 전문분야를 다 알 수 없고, 사법서비스 수요자인 시민이 절실히 바라기 때문이다.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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