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우승감독 김승기

2021. 5. 1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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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재학 중에 등단을 해서 시인이 됐다. 나의 모교 동국대학교는 시의 전통이 강력한 곳이다. 전성기에는 대한민국 시인의 절반을 배출했다는 명성을 누렸으니 ‘시인공화국’이라는 자부심이 허황되지 않았다. 만해 한용운 스님으로부터 미당 서정주, 조지훈, 이형기, 신석정, 송혁, 강민, 홍신선, 박제천, 김초혜, 문정희, 윤제림, 공광규, 정희성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시맥은 특히 국문학과 학생들을 ‘시인/비시인’으로 나눌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대학에 입학한 국문학과 학생들은 대개 ‘동국문학회’에 가입했다. 학생들은 해마다 발간되는 작품집과 사화집, 교지나 학보, 공동시집 등에 작품을 실었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이런 토양에서 성장한 내가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책을 낸다면 당연히 시집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1993년 겨울,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신문사 선배께서 친조카라며 출판인 한 분을 소개했다. 세진기획의 전경배 대표였다. 세진기획은 ‘한글윈도우 3.1’, ‘겁나게 쉬운 멀티미디어’, ‘포토샵5’ 등 컴퓨터/IT 부문의 책을 전문으로 내는 곳이다. 전 대표는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만날 무렵에는 점점 뜨거워지는 농구코트의 열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특히 젊은 선수들에 대한 팬들의 관심과 사랑이 각별함을 주목했다. 전 대표는 그들의 이야기를 묶어 책을 내고 싶어 했다. 그는 나에게 “책이 팔리든 말든 상관없으니, 재미있는 책 한 권 만들어 보자.”고 했다. 책에 들어갈 원고를 내가 써 주었으면 좋겠다는 요구도 빠뜨리지 않았다. 나도 이 무렵에는 농구에 완전히 몰입해서 24시간 농구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니 전 대표의 제안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바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원고를 쓰는 데 한 달 남짓 걸렸다. 원래 기록을 많이 하는 편인데다 스크랩을 해둔 자료가 많아서 가능했다. 중간 중간 선수들을 인터뷰해서 그 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많이 찾아냈다. 이렇게 해서 1994년 3월 1일자로 초판이 나왔다.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 그런데 반응이 엄청났다. 책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글이 훌륭해서가 아니었다. 당시의 분위기에 비춰볼 때 무슨 이야기를 쓰든 농구에 대한 것이면 팔렸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중문화를 농구가 지배하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마이클 조던과 찰스 바클리, 마지막 승부, 슬램덩크…. 특히 대학생 선수들은 이전 세대인 이충희, 김현준, 허재, 강동희도 누려보지 못한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다. 1993-94농구대잔치를 제패한 ‘신촌독수리’들에게 이듬해부터 안암골의 호랑이들이 도전하기 시작했다. 실업팀 현대-삼성-기아로 이어지던 성인농구 무대의 판도는 대학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연세대와 고려대가 중심에 있었고, 중앙대가 이들 못지않은 경기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세진기획에서는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을 거듭해서 인쇄했다. 전 대표는 책이 나올 때마다 나에게 인세를 지급했다. 기자도 월급쟁이다. 1990년대 초반의 신문기자 월급은 다른 직종에 비해 적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전 대표가 건네는 노란봉투를 열어볼 때는 가슴이 서늘했다. 그 정도로 인세를 많이 받았다. 내가 책을 써서 수익을 얻기는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베스트셀러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책을 팔아 목돈을 마련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조정래, 박경리, 최인호, 정찬주, 김훈 같은 대가들과 법정스님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계시긴 했지만. 요즘에 와서는 초판을 1000부 이상 찍는 책이 많지 않다. 300부나 500부 출판도 흔한 일이 되었다. 나는 책을 공저 두 권을 포함해 스무 권 썼지만 1000부 이상 찍은 책은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을 포함해도 다섯 권뿐이다.

아무튼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은 많이 팔렸다. 농구인들의 지원도 컸다. 농구협회에서는 어느 날 농구대잔치 경기가 열리는 잠실학생체육관 로비에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을 판매하는 매장을 설치해 주었다. 당시 농구협회 전무를 맡은 김영기 선생님의 배려였다. 매장에 가져다 쌓아 둔 책은 500부가 넘었다. 모두 팔렸다. 이렇게 책이 많이 팔리자 농구팬들은 저자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경기장에 가면 “허진석 기자님 아니세요?”하고 묻는 농구팬이 적지 않았다. 내 사진을 찍어간 팬도 있다. 플래시가 번쩍 터지는 자동 필름카메라로 찍은 내 사진을 어디다 썼는지 모르겠다.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 이후 농구선수를 다룬 책이 몇 권 더 나왔다. 그 책들도 많이 팔렸다고 들었다.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만큼은 아니었지만, 출판사는 최소한 손해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1998년 8월 12일에 나온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 2』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초쇄를 겨우 소화한 뒤 판을 접었다.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 2』는 새로운 책이 아니다. 수록 선수를 몇 명 바꾸고 일부는 고쳐 썼으니 개정판에 가까웠다. 독자들은 새 책이라고 생각했다가 내용을 확인한 다음 살까 말까 망설였으리라.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에 수록한 선수는 강동희, 김승기, 김유택, 김재훈, 문경은, 서장훈, 오성식, 우지원, 이상민, 허재, 현주엽이다.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 2』에는 강동희, 김승기, 김영만, 김훈, 문경은, 서장훈, 우지원, 이상민, 전희철, 허재, 현주엽을 수록했다. 결국 김유택, 김재훈, 오성식을 빼고 김영만, 김훈, 전희철을 새로 넣은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 생각해 보니 김유택을 빼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 2』에 넣을 만한 선수가 아니었다 싶은 선수도 있다. 아쉽다. 하지만 어쩌랴. 나의 안목이 겨우 그 정도였던 것을.

세진기획과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 2』를 만들기 위해 편집회의를 할 때, “김승기를 계속 넣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중앙대를 졸업하고 삼성에 입단한 김승기는 중앙대학교에 다닐 때만큼 강력한 농구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경쟁력은 잃지 않았고, 강동희나 이상민에 필적하는 가드로 존재감이 뚜렷했다. 김승기 대신 들어갈 만한 선수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다. 나에게 김승기는 특별한 가드였다. 다른 가드들이 가지지 못한 장점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기자들은 코트사이드에 설치한 보도석에 앉아 경기를 취재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기사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누가 드리블을 하고 있는지 알 정도로 귀가 예민했다. (기자가 되면 다 그렇게 된다. 맞은편 벤치에서 감독이 선수들에게 움직임을 지시할 때, 그들의 입모양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김승기가 드리블을 할 때는 시각과 청각이 모두 즐거웠다. 김승기의 코트 바닥을 쪼개버릴 것 같은 파워 드리블, 강력한 회전이 걸린 채 직선으로 날아가는 중장거리 패스를 좋아했다. 신동찬 이래로 김승기처럼 강한 체스트 패스를 뿌리는 가드를 나는 보지 못했다.

김승기는 프로농구 선수로서 성공한 편이 아니다. 중앙대학교의 리더로서 보여준 재능을 실업-프로 무대에서 재현하지 못했다. 그의 기량이 쇠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승기는 뛰어난 가드였지만 대학 선배인 허재나 강동희, 한때는 라이벌이었지만 프로 출범 이후로 위상이 달라진 이상민과는 플레이의 결이 달랐다. 그들은 모두 기술이 뛰어나고 일대일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외국인 선수와의 협업에 능숙했다. 프로농구에서 이상민이 거둔 성공은 조니 맥도웰을 빼고 생각하기 어렵다. 강동희와 허재가 프로원년 기아에서 보여준 농구는 클리프 리드와 함께 검토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기아의 최인선 감독이 허재를 벤치에 앉혀두고도 플레이오프 타이틀을 따내는 모습을 보고 한국 농구의 중심이 기울고 있음을 확신했다. 출범 당시 프로농구는 팀마다 외국인 선수 두 명을 기용할 수 있게 했다. 장신(203.2㎝ 이하) 선수 한 명, 단신(190.5㎝ 이하) 선수 한 명. 골밑선수 두 명 중 한 명, 외곽선수 세 명 중 한 명을 외국인 선수로 기용한다는 취지였다. 외국인으로서 외곽을 맡은 선수의 스피드와 화려한 기술, 골밑을 맡은 선수의 득점과 덩크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리드와 맥도웰 등은 단신이면서도 (사실 이들은 모두 제한 규정보다 키가 컸다) 골밑에서 강한 득점력을 발휘했다.

농구대잔치 시대만 해도 굴지의 가드로 평가받던 김승기는 외국인 선수와 호흡을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김승기는 전형적인 팀 플레이어였다. 그런데 외국인 선수의 손에 공이 들어가면 경기의 흐름이 멈추고 공은 돌아오지 않았다. 더구나 삼성이 뽑은 외국인 선수들은 클리프 리드나 조니 맥도웰처럼 골밑에서 강한 결정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삼성 시절의 김승기는 동료 외국인 선수들과 자주 충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프런트가 김승기를 트레이드한 결정은 매우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삼성은 김승기를 지켜야 했다. (마찬가지 관점에서 2001년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에서 모두 우승한 삼성이 문경은을 트레이드한 결정도 실수라고 생각한다.) 삼성은 양경민과 김승기를 나래에 주고 주희정과 강병수를 받았다. 양경민은 나래에서 빛을 보았지만 김승기는 그러지 못했다. 주희정은 2001년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가 됐지만 사실 삼성 우승의 주역은 아티머스 맥클래리였다. 맥클래리는 골밑과 외곽에서 전인적인 활약을 보였다. 요즘 같았으면 MVP를 받고도 남음이 있었다.

선수의 기량은 제 때에 꽃을 피워야 한다. 그 시기를 놓치면 다시 추진력을 얻기 어렵다. 김승기의 프로경력은 눈부신 장면 없이 끝났다. 2005-06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다음 동부의 코치를 맡음으로써 지도경력을 시작했다. 이때 감독이 전창진, 수석코치가 강동희였다. 김승기가 현역에서 물러날 무렵 농구기자로서 나의 경력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중앙일보에서 초일류신문 중앙SUNDAY (지금 어떻게 평가를 받든 이 신문을 창간하기 위해 준비할 때의 지향은 분명 세계적인 수준의 ‘퀄리티 페이퍼’였다.) 창간을 위해 조직한 ‘신매체본부’라는 연구팀에 들어가면서 현장을 떠난 것이다. 당시에는 신문을 창간한 뒤 다시 현장으로 복귀할 줄 알았다. 결과적으로는 중앙SUNDAY 창간과 동시에 에디터(보통 신문사의 부장 격)가 되면서 데스크에 눌러앉고 말았다. 김승기는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내게 가끔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의논도 했고, 나도 이따금 그의 안부를 물었지만 기자-선수 시절만큼 치열하지는 않았다. 그를 향한 나의 특별한 감정(중앙대의 감독으로 오래 일한 정봉섭 선생은 자주 “허기자가 없었다면 오늘의 김승기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김승기가 중앙대에서 명성을 떨치고 삼성에 스카우트되어 국가대표로 활약할 때의 이야기다)도 추억 속으로 가물가물 사라져갔다.

나는 5월 9일 프로농구 KGC가 안양실내체육관에서 KCC를 84-74로 이겨 4연승으로 우승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았다. 챔피언결정전 경기를 최소한 한 번은 보겠다는 자신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코로나19의 유행은 대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벌써 세 학기 째 비대면 수업을 하고 있는 교수들도 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편이다. 동영상으로 하는 수업에 학생들을 100% 몰입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해서 더 재미있고 유익한 강의를 하려고 노력한다. 한국체육대학교에는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실이 적지 않다. 나 역시 새벽에 출근해서 늦은 밤에 퇴근하는 편이다.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옳지, 이제 퇴근하는 길에 프로농구와 프로야구 경기를 가끔 볼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지만 현실이 되지는 않았다. 아무튼 텔레비전 화면 속, 어느덧 나에게는 아득히 멀어진 어느 곳에서 플레이오프 10전 전승이라는 놀라운 기록과 함께 무패 우승신화를 완성한 KGC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감독이 된 김승기는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았다. 그 장면을 보다가 문득 코끝이 찡했다. 지나간 시간이 눈앞에서 섬광처럼 명멸했다. 김승기가 빛나는 순간을 누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김승기는 전창진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당연한 일이다. 현역에서 물러나 코치가 된 뒤 호흡을 맞춘 첫 감독이니까. 전 감독에게서 많이 배웠을 것이다. 전창진 감독에게는 여러 가지 미덕이 있다. 안준호 전 삼성 감독은 “선수들로 하여금 운동을 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했다. 물론 원주에서 선수들을 이끌 때의 전창진과 2021년의 전창진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원주의 전창진은 신선하면서도 선명했고, 때로는 순진했다. 10점을 지든 20점을 지든 선수들에게 “프로는 끝까지 하는 것”이라며 집중해 달라고 독려했다. 그러던 전창진은 언제부턴가 “다음 경기를 생각해서 이미 넘어간 경기는 버린다.”고 말하게 되었다. 사실 많은 감독들이 버릴 경기는 버리고 이길 수 있는 경기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전창진의 판단이 그릇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김승기는 전창진에게서 농구를 배웠다고 생각하고, 그 가치에 의미를 둔다. 전 감독이 어려운 입장일 때, 누구도 그를 위해 대신 말하지 않을 때 김승기는 “그 분의 피를 이어받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전 전 감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나의 농구는 곧 그 분이 지금까지 하셨던 농구다. 그분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다.” 김승기는 중심이 강하고 인간다운 깊이가 있다.

김승기는 2016-17시즌 KGC를 우승으로 이끌며 감독으로서 첫 왕관을 썼다. 그때 나는 무관심했다. 당시 KGC는 삼성을 4승2패로 제압하고 플레이오프를 제패했다. 삼성의 감독은 이상민이었다. 이상민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김승기가 한때 이상민과 더불어 대학농구 코트를 양분한 포인트가드였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대학 수준에서 김승기는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경기 운영과 강력한 수비를 보여줬다. 특히 일본과의 경기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하세가와 마코토, 나야 코지 등 일본이 자랑하는 천재 가드들을 쉽게 제압했다. 이런 장점 때문에 여러 감독들(최부영, 최희암 등)이 일본과 경기할 때 김승기를 먼저 코트에 들여보냈다. 김승기는 뒤지는 경기를 따라잡고 뒤집는 장면, 멋대로 날뛰는 상대팀의 포인트가드를 묶어버리는 장면에서 존재감이 뚜렷했다. 그리고 이 대목을 쓰면서 나는 운명의 얄궂음을 새삼 체감한다. 감독이 된 김승기가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했던, 그리고 매번 돌파해 나아간 몇 가지 과제들. 헤아려보면 이상민과 전창진 모두 김승기가 넘어야 할 숙명이 아니었던가. 김승기는 이 시대 최고의 감독이라고 해야 마땅할 유재학마저 누르고 완전우승을 달성했다. 그에게는 이제 스스로 정한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할 과제만이 남았다.

오랜 기억 하나. 어언 30년이 멀지 않다. 나는 1993년 4월, 정확하게는 25일 저녁부터 26일 새벽까지 홍콩의 퀸엘리자베스 스타디움 근처에 있는 맥주집에서 밤을 샜다. 그 해 4월 21일부터 25일까지 제1회 아시아청소년(22세 이하) 선수권대회가 열렸고, 한국은 결승에서 대만에 져 준우승에 그쳤다. 최부영 감독-최희암 코치 체제였다. 서장훈, 조동기, 전희철, 문경은, 이상민, 김승기, 현주엽 등이 포진해서 언론에서는 한국의 드림팀이라고까지 평가했다. 기대를 많이 모은 팀이 뜻밖의 상대에게 져서 우승을 내주고 보니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나는 그날 밤 졸업반(4학년) 학생만 따로 불러 저녁과 맥주를 사주었다. 문경은, 김재훈, 조동기, 홍사붕, 김승기로 기억한다. 맥주집 종업원에게 얼음을 채운 버킷에 맥주를 가득 채우고, 비는 즉시 채워다 놓으라고 했다. 맥주를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삼성에 입단하기로 한 문경은과 김승기가 의기투합하고, 기아에 입단할 조동기가 “기아 만세!”를 외쳤다. 그 자리에서 김승기가 내 귀에 대고 “저는 터보가드라는 별명보다 기자님이 저를 ‘쇠절구 같다’고 표현한 기사가 더 좋습니다!”하고 외친 기억이 난다. 나는 중앙일보에 쓴 기사에서 이상민과 김승기의 드리블을 청각적으로 묘사했다. “이상민의 드리블은 먼데서 다듬이질을 하는 듯 유려하고 김승기의 드리블은 쇠절구를 두들기는 듯 묵중한 가운데 힘이 느껴진다.” 그 기사를 읽은 것이다.

나는 기자로서 내 길을 모두 걸었다. 김승기에게는 감독으로서 가야 할 먼 길이 남았다. 그의 앞에 어떤 운명이 새로 펼쳐질지 나는 모른다. 그는 지금까지 잘해왔듯이 앞으로도 잘해나갈 것이다. 두 차례 우승은 눈부신 커리어지만, 그의 앞에는 더 뛰어난 업적을 쌓아온 명감독들이 있다. 신선우와 최인선은 프로농구 초창기의 전설로 남을 것이 틀림없다. 유재학과 전창진의 업적은 두 사람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김승기의 업적이란 문경은이나 이상범의 우승 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막 불붙은 관솔과 같아서, 언제 허무하게 꺼져버려도 이상할 것이 없다. KGC가 우승하는데 제러드 설린저의 공이 컸다는 사실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우수한 외국인 선수를 뽑았다고 해서 우승을 보장받을 수는 없고 어떤 스쿼드든 감독의 운영에 따라 결과가 달라짐은 자명한 사실이다.) 김승기가 이번 우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만족하고 있는지,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지, 부끄럽게 생각하는지. 다만 위대한 릭 피티노가 말했듯 김승기의 앞날은 ‘목적지가 있는 여행’이 아니다. “끝이 없는 순환과정이며 지속적인 성공과 자기발전을 위한 기회이며 도약대이다. 기대이상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은 경주의 종착점에 도착해서도 쉬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항상 다른 경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의 밑바닥에는 보이지 않고, 은밀히 활동하고, 기습에 능한 바이러스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성취의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한 사람은 그때부터 자신의 내면의 말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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