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제기의 '배우'다] '난타' 하차 땐 김원해와 눈물.. 성실은 류승룡의 힘

라제기 2021. 5. 12.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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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배우 류승룡의 영화 속 다양한 모습.

숙취에 시달리다 조식을 먹기 위해 호텔 식당을 찾았다. 자리에 앉는데 지나가던 누가 아침 인사를 했다. 자신은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전날 도착해 시차로 몸이 무거울 텐데 지나치게 부지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난타’ 해외 공연을 다니면서 굳어진 습관이에요. 외국 나와 아무리 피곤해도 아침 잘 챙겨먹어야 하루를 든든하게 보낼 수 있거든요.” 9년 전 영국 런던에서 만난 류승룡의 모습은 오래도록 잔상을 남겼다. 별스럽지 않은 일상이, 성실함이 몸에 밴 그의 삶을 보여주는 듯했다.

류승룡은 2000년대 초반 인기 있었던 논버벌 퍼포먼스 ‘난타’로 세계를 주유했다. 지금은 영화와 방송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김원해와 장혁진이 무대에 함께 올랐다. ‘난타’는 공연계 히트상품으로 꼽혔으나 배우들 생계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류승룡이 먼저 무대를 떠났는데, 공연 하차를 말리는 김원해와 서로 눈물을 쏟으며 전화통화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료들과 애정을 쏟은 무대를 벗어나 새 길을 개척해야 하는 슬픔과 막막함이 만만치 않았을 듯하다.

류승룡의 영화 데뷔작은 서울예술대학 동문 장진 감독이 연출한 ‘아는 여자’(2004)다. 그는 은행강도1로 짧게 출연한다. 불치병으로 시한부인생을 살게 된 야구선수 동치성(정재영)이 은행 담보대출 상담을 하는 장면에서다. 총을 들고 뛰어든 강도들을 보고 모두 몸을 숙이는데, 죽음이 두렵지 않은 동치성만 빳빳하다. 은행강도1은 그런 동치성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넌, 뭐야 XX! 안 엎드려?” 류승룡의 딱딱한 말투가 어설프다. 강렬한 눈과 굵은 목소리로 어떤 역할이든 능청스럽게 소화해내는 그답지 않다. 무대에서 연기 잔뼈가 굵은 노련한 배우라도 카메라 앞은 낯설었던 듯하다.

류승룡은 단편영화 '고마운 사람'에서 인간미 있는 수사관을 연기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류승룡은 이후 ‘박수 칠 때 떠나라’(2005)와 ‘거룩한 계보’(2006) 등 장 감독 영화에 잇달아 출연했다. 그즈음 그의 연기 실력을 발견하게 한 첫 영화가 단편 ‘고마운 사람’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옴니버스영화 ‘다섯 개의 시선’(2006)에 포함된 영화였다. 류승룡은 운동권 대학생을 심문하고 고문하는 수사관 김주중을 연기했다. 대학생과 대화를 나누다 친해져서 오목까지 두는 인물이다. 나중엔 대학생에게 몸 덜 상하고 고문을 견뎌낼 수 있는 비법까지 전달해준다. 생계를 위해 잔혹한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도 인간미는 잃지 않는 인물 김주중은 류승룡의 웃음기 어린 연기를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 도드라진 연기 때문이었을까. 류승룡이 맡아온 인물 중 김주중이 그와 가장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지난 3월 개봉한 영화 '자산어보'에서 류승룡은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간 정약용을 연기했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류승룡은 본능보다는 치밀한 계산과 준비로 연기하는 배우로 알려졌다. 촬영 현장에서 촬영횟수를 거듭할수록 지치기보다 연기가 더 좋아지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예열이 좀 늦지만 뒷심이 만만치 않은 배우인 셈이다. 그런 그의 연기 스타일은 그의 연기 인생과 닮은꼴이다. 서른 중반에야 스크린에 뛰어들어 ‘최종병기 활’(2011)과 ‘내 아내의 모든 것’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7번방의 선물’(2013)이 연달아 흥행 성공하며 마흔 넘어서 인기 절정에 올랐다. ‘명량’(2014) 이후 ‘손님’과 ‘도리화가’(2015), ‘염력’(2017) 등으로 저조한 흥행성적표를 받아들며 내리막길을 걷는 듯하다가 ‘극한직업’(2019)으로 다시 솟구쳐 올랐다. 꾸준함이 가져다 준 결과라고 생각한다.

영화 '최종병기 활'의 류승룡은 청나라 장수 쥬신타 역을 맡아 지금은 사어가 된 만주어 대사 연기를 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류승룡은 지난 3월 개봉한 ‘자산어보’에서 신유박해로 귀양간 정약용을 연기했는데, 부질없는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난 듯한 표정을 보여주곤 했다. 회한에 휘둘리지 않고 저술활동에 몰두한 정약용이 가졌을 만한 얼굴이었다. 부침을 겪으며 연기를 지속해온 류승룡에게 안성맞춤인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9년 전 런던. 그는 레스터광장 오데온극장에서 ‘광해, 왕이 된 남자’ 상영이 끝난 후 담배 한대를 피우기 위해 극장 밖으로 나왔다. 지나가던 영국인들이 “한국 배우 아니냐”며 그를 알아봤다. 당시 그는 한류스타가 아니었기에 의외였다. 류승룡 역시 당황한 듯했다. 은행강도1로 처음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그는 해외에서까지 알아보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꾸진 않았을 듯하다. 오늘의 류승룡을 만든 건 헛된 꿈보다 하루하루의 성실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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