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 증오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김태훈 2021. 5. 11.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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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뒤 독일 혐오 극심
체코·소련 등 보복행위 자행
약자만 다치는 악순환 계속
관용·절제만이 인류 구원해

1945년 5월 30일 밤 체코 제2의 도시 브르노. 겁에 질린 독일계 주민 3만여명이 강제로 거리에 내몰렸다. 20여일 전 나치 독일은 패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 지배를 받은 체코는 해방됐다. 복수의 시간이 온 걸까. 체코인들은 독일인들한테 56㎞를 걸어 국경 밖으로 꺼지라고 명령했다. 오늘날 ‘브르노 죽음의 행진’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워싱턴포스트 기자 출신 마이클 돕스가 2차대전 막바지 6개월을 기록한 ‘1945’는 당시 참상을 이렇게 전한다.

“몸이 성한 남자들은 이미 추방당했다. 여자, 어린이, 늙은이, 환자만 남았다. 무장한 간수들에게 둘러싸인 독일인들은 마치 가축처럼 끌려갔다. 낙오되는 사람은 누구든 도랑에 처넣어 죽게 내버려졌다.” 가혹한 학대 끝에 2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김태훈 국제부장
그 시절 나쁜 독일인과 좋은 독일인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가톨릭 사제조차 “독일인은 사악하므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도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동했다. 체코 내 독일인들은 체코어 ‘네메츠(Nemec·독일인)’의 첫 글자 N을 왼쪽 가슴에 큼직하게 붙이고 다녀야 했다.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이 노란 별 부착을 강요당한 것처럼 말이다. ‘1945’에 따르면 한 미군 장교는 보고서에서 “독일인에 대한 체코인의 취급은 독일인이 유대인을 취급한 것과 거의 같다”며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는 것으로 정의를 세울 수는 없다”고 개탄했다.

나치 독일을 향한 분노는 정당하다. 그러나 나치와 무관한 다수 독일인까지 혐오하는 건 부당하다. 증오가 판치는 사회일수록 강자들은 그럭저럭 버티고 약자들만 피해를 뒤집어쓴다. 소수민족, 이민자, 어린이, 노인, 그리고 여성이 대표적이다.

2차대전 중반까지도 소련(현 러시아)은 독일에 밀리며 패색이 짙었다. 군인과 민간인을 더해 소련인 2700만명 이상이 독일군에 죽임을 당했다. 전세가 뒤집히고 1945년 1월 이제 소련군이 독일 국경을 넘어 밀고 들어갔다. 끓어넘치는 증오 속에 잔인한 앙갚음이 뒤따랐다. 영국 역사가 앤터니 비버는 저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점령한 독일 영토에서 성폭행한 여성이 최소 20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소련군의 성범죄를 고발하며 비버는 “지난날의 굴욕과 고통을 해소하려는 유혹에 압도되어 적국의 약한 여자들을 상대로 이런 일을 벌이게 된 것”이라고 적었다. 자국민 2700만명의 희생을 딛고 희대의 악당 히틀러를 끝장낸 소련의 공로가 아무리 커도 그것이 독일 여성 200만명의 인권 유린을 덮는 면죄부가 될 순 없다.

1945년 8월 30일 맥아더 원수가 이끄는 미군이 패전국 일본을 접수하러 도쿄에 도착했다. 일본인들 사이에 미군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했다. 몇몇 일본군 장교는 “어차피 우린 몰살당할 것”이라며 진작 할복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쿄 시내엔 변변한 숙박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맥아더를 비롯한 미군 고위 장교들은 요코하마의 한 호텔에 임시로 묵었다. 투숙 첫날 호텔에서 차린 맥아더의 식사를 보고 몇몇 부하가 길길이 날뛰었다. 미국을 저주하는 일본인이 독을 풀었을지 모르니 호텔 사장을 불러 시식을 시켜보자 했다. 맥아더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건 군국주의와 무관한 다수 일본인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겨서다.

윌리엄 맨체스터가 쓴 맥아더 전기를 보면 당시 호텔 사장은 이런 승자다운 아량에 퍽 감동한 듯하다. 사장은 맥아더의 테이블 옆으로 다가가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저와 종업원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영광을 누린 것”이라고 말했다. 1951년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맥아더는 일본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체코에서 브르노 죽음의 행진 후 70년이 흐른 2015년 5월 브르노 시의회가 성명을 발표했다. 독일인 강제추방을 “인륜적 비극”으로 규정하며 “진실로 반성한다”고 사죄했다. 증오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인류를 구원하는 힘은 관용과 절제에서 나온다는 점을 깨닫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앞서 소개한 미군 장교 말처럼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는 것으로 정의를 세울 수는 없다.”

김태훈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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