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가 아닌 삶의 태도로..'기쁘게 저항하는 기술'을 연마하자 [이길보라의 논픽션의 세계 ⑤]

이길보라 작가 2021. 5. 11.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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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라이프 스타일

[경향신문]

어른들을 위한 여행학교 ‘로드스꼴라’는 2016년 첫 여행지로 쿠바에 갔다. 다양한 연령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쿠바의 곳곳을 걷고, 살펴보며 3주간 동행하면서 서로에게 수많은 질문과 대답을 하는 사이 하나의 참조집단이 되어갔다. 여행지에서 만난 쿠바 대학생들과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영숙 제공
‘나는_낙태했다’는 글을 기고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최근 몇년 사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페미니즘이란 의제
분노하는 이들이 이렇게 가득한데…왜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까
스승의 제안으로 달려간 쿠바에서 몸으로 부대끼며 배웠다
일상 속에서 끈끈한 동료를 만나고 집단적 흐름을 만들어가야 함을

2016년 10월, 한 일간지에 ‘나는_낙태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실었다. 보건복지부가 ‘불법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의료법 개정을 예고하자 이에 반발한 이들이 서울 보신각 앞에 모여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집회를 열었다. 몇몇 여성이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임신중지 경험을 공유했다. 집회에 가지 못한 부채감이 남았고, 그곳에서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글을 쓰기로 했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나는 임신중지를 했다. 나의 어머니도 임신중지를 했다. 나의 할머니 또한 임신중지를 했다”라는 글로 시작하는 칼럼이었다.

어려웠다. 기한에 맞춰 송고할 수 없어 신문사에 양해를 구했다. 오래 외면해왔던 감정을 마주했다. 이 비참함이 왜 나만의 것이어야 하는지, 여성의 3분의 2가 임신중지를 경험한다는데 이것은 왜 사회적으로 말해지지 못하는지, 지금 나의 입을 틀어막고 나의 자궁에 대해 논하고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지 글을 통해 물었다. 칼럼이 게시되고 신문이 발행되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지면에 싣는 일은 생각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어떤 약속도 잡지 않고 캄캄한 방에 앉아 있었다.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해 초, 쿠바에 함께 다녀온 김현미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였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이 정말 큰 힘을 지닌다고, 중요한 글을 써주어 고맙다고, 보라의 삶을 통해 많이 배운다는 내용이었다. 남성인 대학 동기는 괜찮다면 밥이나 먹자며 집 앞으로 달려왔다. 칼럼을 읽고 온 듯했지만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같이 밥을 먹고 싶었다고 했다. 임신중지를 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어떻게든 풀어내고 싶어 시를 썼다. 서로의 글을 읽고 합평하는 수업에서 발표했다. 알 듯 모를 듯 애매하게 감춘 형태의 시였다. 모두가 무슨 글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자 스승이 저녁을 먹자고 권했다. 그는 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함께 밥을 먹었다.

삶의 태도, 가치, 지향점의 일관성

김현미 교수의 책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뜨거운 의제였다. 페미니즘 관련 도서가 연이어 출간되었고,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명명하는 1020여성들이 늘어났다.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 현상도 거세졌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이들이 SNS 등 온라인 공간을 통해 연대했다.

여성혐오를 비롯한 각종 사안에 대해 공분하고, 페미니즘 관련 프로젝트에 크라우드펀딩 등을 통해 참여했다. 여성혐오 관련 사건을 조사하거나 처벌해 달라는 내용의 국민청원 링크가 올라오면 동의 버튼을 누르고 소식을 공유했다. SNS에 해시태그를 달아 글을 게시함으로써 사안이 묻히지 않도록 분노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회 소식이 있다면 재빨리 달려 나갔다.

그러나 생각만큼 세상은 빠르게 바뀌지 않았다. 이상했다. 나의 SNS 타임라인은 이토록 뜨거운데 왜 세상은 그렇지 않을까. 사안에 대해 분노하고 절망하는 이들이 주위에 가득한데 어째서 사회는 그대로인 걸까. 지쳐갔다. 외치고 싸우는 여성들이 세상을 바꿔낼 거라고 믿었지만 일상을 파고드는 혐오에 쉽게 마음을 다쳤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겼고 고립감이 들었다. 우리는 정말 대항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지, 페미니즘 운동에 나는 어디쯤 서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역사와 계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여성 자립을 돕는 커뮤니티 ‘줌마네’에서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김현미 교수가 쓴 책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반비, 2021)은 제목 그대로 ‘라이프스타일’로서의 페미니즘을 제안한다. 페미니즘은 양비론이나 이분법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단순한 ‘소비’가 아닌, 평생 가져가야 할 삶의 태도이자 세상을 보는 관점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에너지를 누구와 무엇을 모색하며 어떤 희망과 목적을 갖기 위해서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입장이 라이프스타일이다. 소비나 문화를 통해 자신의 감각, 쾌락, 원하는 삶의 형태를 확인하고, 자신이 택한 패션, 음악, 음식 등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 곧 여성의 지위와 권력을 향상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실험하는 페미니즘이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살아냄과 살아내기에 더 방점을 두는, ‘소비’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 가치, 지향점을 일관되게 지켜나가는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해 신용카드로 크라우드펀딩에 참여하면 내가 사회운동과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일종의 정치적 판타지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과연 라이프스타일로서의 사회운동이 가능할까를 질문해”야 한다고, 중요한 건 “마주보고 만나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의견을 교환하는 ‘살아 있는 여성 동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자율적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작은 것이라도 함께해보는 사람들 속에서 있어보는 것이 ‘기쁘게 저항하는 기술들’을 연마하는 길이라고 말이다.

기쁘게 저항하는 기술들

2016년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의 쿠바 여행길에서 참가자들이 함께 걷고 있다. 왼쪽부터 정호현 감독, 이길보라 감독, 또하나의문화 출판사 운영자 유이.

글을 쓰는 작가이자 여행학교 ‘로드스꼴라’를 운영하는 스승이 어른들을 위한 여행 사업을 기획하며 첫 번째 여행지로 쿠바를 골랐다. 쿠바라니! 부러워하고 있을 즈음 스승은 내게 코디네이터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얼씨구나. 쾌재를 부르며 수락했다. 한국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주의 국가 쿠바를 만났다. 전 국민이 무상으로 진료받는 쿠바의 의료 시스템을 들여다보고, 쿠바의 도시농업과 유기농법을 살펴보고, 1900년대 초반 멕시코를 거쳐 쿠바로 향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후손을 만나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조망했다. 쿠바도 쿠바였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다양한 나이대의 페미니스트 여성들과 여행한 경험이었다.

한국에서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거쳐 쿠바로 향하는 장시간의 비행과 무더운 날씨에도 지치지 않고 매일 아침 잘 잤냐며 힘차게 인사하는 김현미 교수를 필두로 하여 매년 시인 고정희의 삶과 문학 세계를 돌아보는 문화제를 주최하는 전남 해남의 고정희기념사업회원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진을 찍는 교사, 가족들과 함께 참여한 전교조 소속 교사, 또하나의문화 출판사와 생태적인 삶을 지향하는 여성 여행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유이, 어딜 가나 펜화와 수채화로 여행을 꼼꼼히 기록함과 동시에 지구과학 전공을 살려 쿠바의 지형에 대해 반짝이는 눈으로 설명하는 남지를 비롯한 이들이 여행의 참가자였다. 혁명의 땅에서 혁명적으로 연애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영화 <쿠바의 연인>으로 만들고 지금은 쿠바에 적을 두고 한국과 쿠바를 잇는 매개자로 사는 정호현 감독이 현지 코디네이터를 맡았다.

우리는 쿠바 혁명을 돌아보고, 교육과 의료 시스템을 들여다보고, 시차 적응에 실패한 채 꾸벅꾸벅 졸며 발레 공연을 감상하고, 쿠바에 왔으니 쿠바 사람처럼 움직여봐야 한다며 살사 수업을 들었다. 실전 연습은 필수라며 살사바에 갔지만 무대를 휘어잡는 현지인의 몸짓을 보고 몇 번 허우적거리다 어색하게 나와야 했던 기억, 어딜 가나 재즈가 넘치던 거리, 포장이 잘되어 있지 않은 길을 걸으며 나눴던 대화, 파란 바다를 바라보던 시간. 돌아보면 그것이 쿠바 여행의 전부였다. 글쓰기 교사로 오래 만나왔던 스승과 함께 일해보는 경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여행지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하며 쩔쩔맬 때 괜찮다고 어깨를 다독여주던 참가자들, 쿠바의 골목을 걸으며 나눴던 질문과 대답. 그것은 내게 참조집단을 만나고 형성하는 기회였으며 동시에 다양한 세대, 서로 다른 지역과 현장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와 교류하며 기쁘게 저항하는 기술들을 배운 시간이었다.

김현미 교수는 말한다. “서로의 삶의 역사 속에 기입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 동료를 만들어가라”고. 기억한다. 임신중지 경험을 글로 썼을 때 스승이 말없이 사준 밥을, 누구보다 먼저 달려온 동기를, 김현미 교수가 보내온 문자메시지를, 쿠바의 기억으로 연결된 전국 각지의 언니들을. 그들이 나의 끈끈하고 느슨한 참조집단이자 동시에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을 함께 만들어가는 동료였다.

당신과 나의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최근 페미니즘 운동에서 느꼈던 고립과 단절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소비자본주의하에서 페미니즘을 소비하고 국민청원 동의 버튼을 누르고 해시태그 운동에 참여한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기쁘고 슬프고 어려운 일을 함께할 페미니스트 동료를 만나고 일상을 재조직하고 집단적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그런 마음으로 ‘보라글방’을 시작했다. 내가 글쓰기를 배웠던 공간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써서 모여 합평하는 수업이자 커뮤니티다.

내 글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글을 정확하게 읽고 사려 깊은 의견을 주고받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글쓰기를 도구로 삶을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을 고민하며 나의 동료와 동지를 만들어가려 한다.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기쁘게 저항하는 기술들을 찾아가겠다. 당신과 내가 만들어갈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을 상상하며.

▶이길보라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다.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의 선천적 자질이라고 믿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든다. 저서로는 <길은 학교다> <로드스쿨러>(공저) <반짝이는 박수 소리> <우리는 코다입니다>(공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가 있고, 연출한 영화로는 <로드스쿨러>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이 있다.

이길보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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