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두 얼굴..겉으론 백신특허 면제 지지, 뒤에선 원료수출 차단

최서윤 기자 2021. 5. 1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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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외교' 영향력 과시 이면 '美 우선주의' 여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5월 7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 로이터=뉴스1 자료 사진

(서울=뉴스1) 최서윤 기자 = "미국의 백신 공급은 미국 수요를 충당할 만큼 늘었고 실제로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 민주주의 무기고였듯, 다른 나라들을 위한 백신 무기고가 돼 세계에 영항을 미칠 것입니다. 단, 그 전에 모든 미국인이 백신을 맞을 것입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취임 100일 기념 의회 양원 합동 연설 중 발언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서 백신을 대하는 미국의 자세'를 분명히 보여준다. 모든 미국인 접종에 충분한 백신을 '우선' 확보하고, 백신 공급으로 세계에 '선한 영향력'도 끼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미국이 돌아왔다'고 천명한 바이든 대통령은 선진국의 '백신 이기주의'를 꾸짖는 목소리 앞에 제약회사들의 지식재산권 유예 지지 의사를 밝혔다. 취임 100일 안에 3억3000만 미국 인구 중 2억여 회분 접종을 마친 뒤 미 제약사 다수가 대상이 되는 지재권 포기를 종용한 것은 앞서 밝힌 의지를 실천하는 행보처럼 보인다.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의 백신 부족 위기가 제약사들의 지재권 보유 욕심에서 촉발한 것이라면, 바이든 대통령의 '통큰 양보'는 코로나19 지옥에서 세계를 구할 '특효약'이 될 것이란 기대가 컸다.

◇유럽국가들 "백신 원료 수출 규제부터 풀어라" 문제는 미국이 미처 '세계의 백신 무기고'가 되기 전에 먼저 '세계의 코로나19 화약고'가 돼버린 14억 인구 대국 인도의 백신 공급 위기가 미국 정부의 원료 수출 규제로 촉발했다는 점이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중남미 생산 거점을 표방했던 멕시코도 미국의 원료 수출 금지로 생산량을 지키지 못하면서 중남미 백신 부족난이 심화하고 있다.

인도 알라하바드에서 2021년 5월 8일 코로나19 사망자의 가족들과 동료들이 고인의 시신을 옮기는모습. © AFP=뉴스1

미국은 1950년대 한국전쟁 시기 전시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만든 국방물자생산법(DPA)을 코로나19 백신에 적용하고 있다. 국방물자생산법은 대통령이 지정한 산업에 대해 제품 생산부터 가격과 수출까지 직접 통제할 권한을 연방정부에 부여했는데, 이후 자연재해 등 비상 상황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돼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해 3월 코로나19 백신을 국방물자생산법 적용 대상으로 지정했고, 올해 1월 취임한 바이든 대통령도 같은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내 생산된 백신 완제품의 우선권이 미국에 있음은 물론이고, 백신 원료와 자재 이용 우선권도 미 제약사들의 미국내 생산 시설에 있다.

이에 일부 유럽국가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제안을 '언론플레이'로 보고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AFP 통신은 전했다. 유럽연합(EU)은 역내 생산된 4억 회분의 50%인 2억 회분을 90개국에 수출했는데, 미국은 자국산 백신을 모두 내수용으로 묶어둔 채 실컷 '사재기' 후 안쓰기로 한 아스트라제네카 6000만 회분 '나누기'와 공허한 지재권 유예만 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7~8일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열린 백신 지재권 유예 관련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이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는 "미국은 백신(완제품)뿐만 아니라 생산을 가로막는 백신 원료 물질의 수출 금지부터 해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독일 정부는 성명을 내고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백신 공급을 지지하지만, 백신 생산에 있어 가장 큰 제약은 지재권이 아니라 생산량 증가와 품질 보증"이라고 밝힌 바 있다. 로이터통신은 "백신 제조는 복잡하고, 기술과 노하우, 인력 이전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했다.

백신 대량 생산 역량을 갖춘 국가와 기업 제조시설에 대한 원자재 공급부터 기술·노하우 전수, 인력 이전 등 종합적 논의 없는 특허 포기 외침은 '허울'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의회에서 유럽의 날을 맞아 '유럽의 미래'를 주제로 열린 콘퍼런스에 참석해 대화하고 있다.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문제는 지재권이 아니라 백신 물량과 품질"

물론 백신 지재권 유예 논의는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프리카연합(AU) 등 개도국을 중심으로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시작됐고, 이에 미국이 응답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바이든 대통령의 백신 특허 포기 지지 입장에 환영했고, 프란치스코 교황마저 백신 지재권 일시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백신 지재권 유예 현실화는 WTO 164개 회원국 전원의 '찬성'을 요건으로 해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과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당장 백신 한 병이 급한 개도국과 저개발국을 위한 현실적인 해법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제약사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행보는 취약한 공급망을 더 균열시킬 수 있다며 차라리 선진국들이 개도국들에 좀 더 관대하게 백신을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광범위한 백신 접종으로 '고비를 넘긴' 미국은 다른 나라를 도와야 한다는 압력에 직면하고 있는데, 바이든 대통령은 모든 미국인이 백신을 맞은 다음에만 해외에 백신을 공급할 것이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미 어느 정도 품질이 보증된 백신 자체를, 아직 고위험군에 대한 접종도 제대로 하지 못한 다른 국가들과 나눠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를 의식한듯 바이든 백악관의 코로나19 대응을 총괄하는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은 9일(현지시간) 제약사들에 생산 규모 증대를 요구하고, 인도와 다른 필요한 국가들에 '말 그대로 수억 회분의 백신'을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중국 오성홍기와 코로나19 백신의 합성 이미지. © AFP=뉴스1 자료 사진

공교롭게도 미국과 EU간 백신 지재권 유예 '공 주고 받기'가 한창이던 지난 7일 중국 제약사 시노팜의 백신이 WHO의 긴급사용 승인을 받았다. 그간 아프리카와 중남미 개도국에 물량을 공급하며 '백신외교'에 힘써온 중국이 WHO의 백신협력프로그램 코백스(COVAX)를 통해 공식적인 백신외교 선도국으로 발돋움할 문이 열린 것이다.

만약 미국이 백신외교를 가속화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지재권 유예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라면 이번 백신외교 전쟁은 현재 국면에선 WHO가 효능을 50~70%로 인정한 백신을 저가에 다량 수출해온 중국의 '한판승'으로 보인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과 EU가 한창 사재기에 골몰하던 백신 공급 초기부터 이미 자국민 접종과 동시에 수출과 지원의 방식으로 자국산 백신을 개도국에 공급해왔다.

사실 코로나19의 지독한 특성상 미국인 70%가 백신을 접종하더라도 전 세계인 70%가 백신을 맞지 않는 한 실질적인 '집단면역' 달성은 어렵다. 다른 나라에서 창궐한 변이주가 선진국 접종자까지 재차 감염시키는 양상이다.

그런 점에서 바이든호 미국의 '선(先) 자국민 접종 후(後) 백신외교' 전략은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만큼은 처음부터 유효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국제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일부 선진국이 마스크를 벗고 코로나19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한 지금도 전일 기준 전 세계에서는 64만9140명의 확진자와 1만206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날 기준 세계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1억5897만7331명, 누적 사망자는 330만6954명이다.

sab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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