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의 시대에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법
[세계의 창]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한 사건은 이른바 ‘탈진실’(post-truth) 시대의 핵을 잘 보여준다. 지난 3월, 미국의 투표시스템 관리 회사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스’가 도널드 트럼프의 전 법률고문 시드니 파월을 상대로 거액의 지급을 요구하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파월은 도미니언사가 우고 차베스의 지시로 제작된 투표시스템을 사용하여 2000년 대선 결과를 조작했다고 주장하며 부정선거 음모론을 펼쳤던 인물이다.
파월은 소송을 당하자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했던 부정선거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은 황당한 변명을 내놓았다. “도미니언사는 자신들부터 이미 내 주장을 ‘터무니없는 비난’, ‘기괴한 주장’, ‘본질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미니언사가 스스로 명백히 밝히고 있듯이, 내가 했던 주장은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그런 내용에 불과하다.”
파월은 자신이 도미니언사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 되려면 합리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였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는 음모론을 펼쳤다. 물론 히틀러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비난이었고 기괴한 주장이었지만, 그의 주장은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파월의 음모론은 그 터무니없음에도 수많은 이들을 동원할 수 있었고, 미국을 거의 내전 상태로 몰고 갔으며, 사망자까지 발생시켰다.
파월의 변명을 들으면 의문이 생긴다. 합리적인 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파월은 애초 왜 그런 주장을 펼친 것일까?
투표 시스템을 담당하는 회사가 대선 결과를 조작했다는 파월의 주장은 소문의 지위를 점하지만, 그것은 공적 담론의 지위로 격상되어 유통되는 소문이다. 진원지가 불확실한 소문은 진실이 아닐 때조차 이상할 정도로 효력을 발휘한다. 흔히 소문은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듣기로는 ×가 이러저러한 일을 저질렀다더군”처럼 ‘부인’의 형태로 펼쳐진다.
부인의 형태로 전파되는 지독한 소문의 예 하나를 러시아 국영방송국 채널1의 저녁 메인 뉴스 프로그램 <브레먀>에서 찾을 수 있다. 해당 방송은 코로나 위기와 관련한 음모론을 파헤치는 척하면서 모호한 태도로 그런 음모론에 진실의 핵심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코로나 위기의 배후에 서구 엘리트, 특히 미국이 있다는 이 방송의 메시지는 ‘진실이라고 믿기에는 터무니없지만 그것이 진실일지 누가 알겠는가?’ 식의 불확실한 소문의 모습으로 확산된다. 이때 소문은 사실적 진실을 유예하지만 그럼에도 상징적 효능을 전혀 잃지 않는다. 파월은 이렇게 소문이 공론장을 공공연히 돌아다니며 사회적 연결을 형성하는 새로운 시대, 즉 탈진실의 시대가 왔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오래전, 나는 어느 반유대주의자와 격렬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는 시온 장로 의정서가 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이 날조한 문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만든 진짜 문서라고 주장했다. 시온 장로 의정서는 조작된 문서라는 것이 이미 밝혀진 상태이고, 그것이 위서라는 사실은 문서에 담겨 있는 여러 오류만 봐도 명백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반유대주의자는 그런 오류들까지도 유대인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비유대인들의 의심을 받지 않고 시온 장로 의정서를 세계 정복의 지침으로 사용하고자 일부러 오류를 집어넣어 그것을 가짜 문서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미치광이 반유대주의자가 상상했던 것을 파월이 지금 하고 있다. 파월은 과거 자신이 내뱉은 주장을 스스로 터무니없고 기괴하며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가 없는 주장으로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말이 계속해서 진짜 효력을 발휘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탈진실의 시대에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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