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웃의 무모한 교육철학

한겨레 2021. 5. 9.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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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사의 어쩌다 마을][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스무살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우리 사회의 가장 풀기 힘든 문제 중 하나가 교육이라는 건 대개 동의할 것이다. 사교육비 부담에 좋은 학군을 위한 부동산 문제까지 얽히면서 계층 상승은커녕 양극화의 주범으로 지탄받곤 한다. 재벌가쯤 되지 않으면 모두가 고통스럽다. 다 같이 이 피곤한 레이스를 그만두면 좋겠지만, 죄수의 딜레마일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 아이만 낙오될까 두렵다 보니 결국 대부분 피해자가 된다.

7년 전 이 마을로 이사 와서 받은 신선한 충격 중 하나가 교육 방식이었다.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우는 집이 많았다. 자식 하나 키우기도 벅찬 세상인데, 셋을 키우는 가족들도 있었다. 그것도 자유방임으로. 세간의 눈으로 보면 무책임해 보일 법도 한데 그렇지도 않았다. 세 남매 키우는 이웃의 몇 년 전 에피소드 하나. 고3 수험생인 첫째 아들이 여자친구가 생겼다. 부모가 즐겁게 반겨주니 여자친구가 종종 놀러 오고 동네 어른들 모임에까지 어울렸다. 우리도 예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함께한 온 가족 여름휴가에도 동행했다. 보통이라면 펄쩍 뛸 일이지만, 예쁘고 건강하게만 보였다. 우리 부부와 나이도 비슷해서 친구처럼 지내는 정미씨네 이야기다.

정미씨네는 얼마 전 셋째 아들 인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큰 짐을 내려놓았다. 부부는 “셋째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장사도 접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고 전부터 말해왔다. ‘인서울 4년제 대학’은 보내야 자식농사 잘 지었다는 세간의 잣대로 보면 정미씨네 자식농사는 기준 미달에 가깝다. 아이 셋 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단다. “우리 아이들이 공부 머리는 없는 것 같아.” 부부는 쿨했다.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대신 일찍부터 “고등학교까지만 지원할 테니 그다음엔 너희들이 알아서 자립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4년제 대학 힘들게 나와 봐야 취직도 어렵고, 비정규직으로 전전하기 십상인데 굳이 고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게 부부의 교육철학이었다. “2년제 가서 일찍 졸업하고 일하면서 세상 이치를 익히다 보면 자기 진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공부야 하고 싶어지면 그때 새로 시작해도 늦지 않으니까.”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자기 생활비는 벌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아이들 셋에 부부까지 이제 다섯 식구가 경제활동을 한다. 모두가 부러워한다.

첫째 민호는 2년제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전공 관련 업체에 취직했다. 직장을 다니다 오히려 공부에 흥미가 생겨 4년제 야간 과정에 편입해서 주경야독 중이다. 원해서 하는 공부라 열심히 한 것인지, 장학금까지 받았다며 정미씨가 흐뭇해한다.

둘째 딸 채연이도 공부에 흥미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재수할 때까지 진로를 못 정했다. 동네 협동조합 책방에서 이웃 일본인 이주여성이 진행하는 일본어 수업을 듣다가 흥미가 생겼다. 같이 수업 듣던 아빠 친구들이 상담도 해주면서 일본어 전공으로 진학했다. 작년, 코로나로 기회가 막힌 청년들을 정부가 한시적으로 지원하는 제도가 생기면서 채연은 책방의 6개월짜리 직원이 됐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책방의 공부 모임들에 다 참여하면서 경제사, 르네상스, 전염병, 미술사 등 온갖 분야로 관심을 넓혀갔다. “어렵지만 그래도 자꾸 들으니 조금은 알 것 같아요”라며 진짜 공부의 재미를 배워가고 있다. 더 놀라운 변화도 생겼다. 채연이 카운터를 맡자 전에는 기웃거리기만 하던 동네의 20대들이 모여든 것.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글을 쓰고 싶었던, 이것저것 꿈이 많았던 동네의 청년들이 채연과 함께 책방을 아지트 삼아 독서 모임도 꾸리고 공부하고 어울린다. 시의 공모사업에 응모해서 지원도 받았단다. 함께 푸른 꿈을 키우고 있다.

채연의 성장과 변신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상황에 맞서 문제를 풀어가는 ‘삶의 기술’을 일찍부터 배우고 터득했기 때문이 아닐까? 부모는 다그치기보다는 스스로 깨닫고 배울 수 있도록 기다려줬다. 길을 찾아야 한다며 책임감을 심어줬다. 그리고 마을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얻었다. 함께할 친구들도 얻었다. 좁아도 넓은 마을이다.

청년 세대의 어려움이 너무나 큰 시절이다. 정미씨네 아이들처럼 자립심이 강하면 좋겠지만, 시대의 문제를 자립심으로 해결하자고 할 수는 없다. 자립심 강한 이 집 아이들에게도 시대의 시련이 닥칠 수 있다. 다른 집도 다 정미씨네처럼 키우면 된다고 말하는 것도 순진한 해법일 것이다. 해답은 어렵다. 그래도 시대 탓만 하고 있기에는 우리 아이들의 젊음이 너무 짧다. 부모 기대에 부응하느라 전전긍긍하기에 젊음은 너무나 눈부시다. 부모가 먼저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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