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샤이 진보? 샤이 민주당! / 김태규

김태규 2021. 5. 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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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지난 4월7일 저녁 재보궐선거 출구조사 결과가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의 당선 유력으로 발표된 뒤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에 마련된 개표 상황실에 당직자들이 모두 떠나 침울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김태규│정치팀장

딱 4년 전 일이다. 대통령선거 당일 취재를 마치고 정치부 선후배들과 국회 앞 순댓국집에서 한잔했다. 새벽 1시를 넘겨 자리를 마무리하고 택시를 탔다. 다음날 취재를 위해 어서 잠자리에 들어야 했지만 집에 들어와서도 개표방송을 켰다. 당선자의 득표율이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전날 투표에서 나는 기호 5번을 찍었다. 내 생애 다섯번의 대선 중 가장 뒷번호를 선택했다. ‘동성애에 반대하느냐’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질문에 “반대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문재인 후보의 티브이 토론 답변이 결정적이었다.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 상황에서, “동성애는 찬반의 문제가 아닙니다”라는 모범답안도 내놓지 못한 후보에게 내 한 표를 줄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소소한 결단’을 실행에 옮기고도 38~39%에 정체돼 있던 문 후보의 득표율이 계속 신경 쓰였다. ‘40% 지지도 못 얻은 대통령’이라며 정통성 시비가 일까 하는 걱정이었다. 피곤과 취기와 싸우며 시시각각 변하는 득표율을 뚫어지게 관찰했다. 새벽 3시가 넘어 당선자의 득표율 앞자리가 바뀐 걸 확인하고서 티브이를 껐다.

정치 성향 테스트 결과도 그렇고 지금까지의 투표 성향까지 종합해보면, 나는 ‘중도진보’ 유권자다.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 기업 임원들의 임금 상한을 최저임금의 30배로 제한하는 최고임금제가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방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토지 불로소득을 환수해야 한다는 헨리 조지 사상에도 적극 찬동한다.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기에 이런 정치적 성향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올해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과정에서 별안간 ‘샤이 진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지난 2월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 양자 대결을 붙인 두 가지 여론조사가 있었는데, 전화면접과 자동응답을 절반씩 섞은 조사에선 민주당, 100% 전화면접 조사에서는 국민의힘 후보가 약간 앞섰다. 네번의 양자 대결 중 한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차범위 안이었기에 한쪽의 ‘우세’라고 보기에도 어려웠다. 두 조사의 결과 차이에 큰 의미를 부여할 일이 아니었지만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면접원들이 직접 조사하게 되는 조사에서는 샤이 보수가 아니라 샤이 진보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3월24일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캠프가 “민주당과 박영선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적극 표명하지 않고 숨기는 진보 지지층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뒤 민주당 사람들은 ‘샤이 진보’라는 표현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신념을 지켜왔던 진보 유권자들에게 부끄러움을 강요하거나 모욕감을 주는 ‘구호’였다.

‘샤이 진보’라는 명명에 ‘민주당 지지가 부끄러워 말을 못하는 진보적 유권자’라는 긴 뜻이 함축돼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의 원천인 민주당에 방점이 찍혀야 하지만, ‘샤이 진보’ 네 글자에는 민주당의 책임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진보적 유권자들만 부끄러움의 주체로 계속 소환된다. 결별까지 고민하고 있는 연인에게 자신의 잘못은 고하지 않고 “왜 좋아한다고 말을 못하니?”라며 다그치는 꼴이다. ‘진보’는 자유주의 수권 정당인 민주당의 전유물이 아니지만, ‘진보라면 당연히 민주당을 찍어야 한다’는 오만함까지 읽혔다.

잘못된 표현은 그만 쓰는 게 좋다. 그동안 통용되던 ‘샤이 보수’도 틀렸다. 미국의 ‘샤이 트럼프’처럼 한국에는 ‘샤이 박근혜’ 현상이 있었을 뿐이고, 민주당이 역전승의 치트키처럼 부르짖던 ‘샤이 진보’의 실체는 ‘샤이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은 4년 전 ‘기호 1번’을 기꺼이 찍었거나 찍어주지 않았어도 미안해했던 ‘진보’에게 다시는 부끄러움을 강요하지 말기를. 그리고 ‘촛불 연합’을 해체시켜 스스로 위기에 빠뜨린 부끄러운 과거를 되돌아보길. 이제 1년도 남지 않았다.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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