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권 역할론' 이한동 전 총리 별세..정치권 "의회주의자" 애도

장나래 2021. 5. 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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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이 전 총리는 경복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고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서울지법 판사와 서울지검 부장검사 등을 거쳤고 1981년 전두환 정권의 제안을 받아 정치권에 입문했다.

유 실장은 "우리나라 정치에서 통합의 큰 흔적을 남기고 지도력을 발휘한 이 전 총리님을 기리고 유족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전해달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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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통합 큰 흔적, 지도력 발휘" 메시지 전해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8일 별세했다. 향년 87. 사진은 지난 2015년 ‘JP화보집 <운정 김종필> 출판 기념회’ 축사 모습. 연합뉴스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이 전 총리는 경복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고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서울지법 판사와 서울지검 부장검사 등을 거쳤고 1981년 전두환 정권의 제안을 받아 정치권에 입문했다. 11대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한 뒤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 후보로 15대까지 내리 5선을 했다. 영호남 지역갈등이 심하던 시절 흔치 않은 경기 북부권 중진으로서 ‘중부권 역할론’을 주창해 주목받기도 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 시절 여당의 원내총무(원내대표)를 3차례 맡는 등 원내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97년 신한국당 대선 후보 ‘9룡’ 중 1명이었으나 당내 경선에서 이회창·이인제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이회창 체제’에 반발해 1999년 한나라당을 탈당한 그는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해 6선에 성공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던 2000년 5월에는 김종필-박태준에 이어 자민련 몫 3번째 국무총리에 올랐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인사청문회를 거친 총리였다. 2002년엔 하나로국민연합 후보로 대선에 도전했으나 0.3% 득표에 그쳤다.

9일 유영민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철희 정무수석은 이 전 총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건국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했다. 유 실장은 “우리나라 정치에서 통합의 큰 흔적을 남기고 지도력을 발휘한 이 전 총리님을 기리고 유족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전해달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했다.

정치권은 그를 ‘의회주의자’로 회상하며 일제히 애도의 뜻을 전했다. 고용진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서면브리핑을 통해 “40여년 정치인생 동안 초당적 협력과 협치를 중시했던 의회주의자, 늘 통 큰 정치를 보여준 거목 이 전 총리의 영면을 기원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애도했다. 김예령 국민의힘 대변인도 구두논평을 내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 이 전 총리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도 진심어린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며 “국민통합과 포용의 정치, 대화와 타협을 중시한 의회주의자로서 많은 후배 정치인들의 귀감이 되어주셨다. 우리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 정도의 정치를 위해 온 힘을 다하셨던 모습을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장나래 기자 w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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