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는 왜 입을 다물었을까

한겨레 2021. 5. 8.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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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옥상자국
<옥상자국> 한 장면.

기억과 증언들이 뒤늦게 당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읽어줄 독자 역시 뒤늦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역사적 상흔을 기억하고자 하는 기념비도 그 시기가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그것을 읽어내줄 독자를 기다리며 세워진다.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주먹밥을 나누어주며 도왔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광주 양동시장에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옥상자국>(2015, 양주연)은 평범한 시민이었던 감독의 외할머니가 경험한 1980년 5월 광주의 기억을 만나고자 시도하는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어느 날 우연히 외갓집 옥상에서 총탄 자국을 발견한다. 그 자국은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생겨난 것이다. 감독은 그 당시 시민들이 느꼈을 일상의 공포에 대한 감각을 말하고 싶어서, 더불어 당시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광주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안고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총탄 자국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자 감독은 외할머니의 삶과 주변을 더듬어보기로 한다. 외할머니는 강한 생활력의 소유자로 앞서 언급한 양동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다. 강단 있어 보이는 외할머니지만 총탄 자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다. 다큐멘터리 초반 카메라에 담긴 외할머니의 말은 ‘평범하게 살라’는 것이다. 그저 자신은 ‘피부에 닿을 만큼의 고통을 겪지 않았다’며 그 시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저한다.

결국 감독은 그 사건의 전말을 외할머니가 아닌 외할아버지를 통해 듣게 된다. 옥상 자국은 예상보다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정부가 ‘거리로 나오지 말고, 폭도를 숨겨주지 마십시오’라는 방송을 반복했고 온 식구는 공포에 질려 집 안에 있었다. 정작 폭도처럼 쳐들어온 것은 군인들이었다. 당시로서는 높은 건물이었던 외갓집 옥상을 사용하겠다며 군인들은 이 가족을 총으로 겁박했다. 그 옥상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길을 걸어가던 이웃 여성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마 총탄 자국은 당시 총격으로 생겼을 것이라고 감독은 추측한다. 영화는 옥상 자국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했지만 누가 총탄 자국을 냈는지는 감독의 관심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이 자국이 집에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에서 계속해서 살아가야 했고, 그 비극을 그저 묻고 덤덤하게 한 가족의 어머니로 살아가야만 했던 외할머니의 삶에 카메라는 더 집중한다. 양동시장에서 같이 일했던 이모할머니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그때 죽은 이가 많아 무서웠다는 말에 조금 고개를 끄덕일 뿐, 외할머니는 그 당시의 공포에 대해서 여전히 입을 다문다.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어쩌면 죄책감일 수도 있는 여러가지 감정을 어떻게 일관된 결로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그 시기를 겪었던 광주 시민이라면 받았을 상처는 어떻게 재현될 수 있을까. 감독은 외할머니의 삶을 통해 간접적인 목격자로서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영화는 역사적 상흔을 기억하는 것 자체는 물론이고 그 기억에 가닿는 것도 쉽지 않음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감독은 추후 ‘그럼에도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란 글에서 외할머니를 세 계절에 걸쳐서 인터뷰했을 만큼 촬영이 쉽지 않았다고 밝힌다. 의도된 침묵일 수도 있는 외할머니의 태도조차도 기억의 일부일 수 있기에 그런 상황 자체를 해석하는 일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외할머니가 일하시던 양동시장에 함께 간 감독이 카메라로 바라보는 5·18기념비 모습은 상징적이다. 양동시장의 여성들을 기리고자 세워진 그 비석은 건물 기둥 때문에 글도 읽기 어렵게 가려진 채 세워져 있다. 평범하게 그 시절을 살아낸 여성들의 기억은 나중에 당도했을 때조차 접근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감독은 여전히 기억을 찾기 위한 시도를 한다. 뒤늦게 도착하지만, 더 늦지 않기를 바라며.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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