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탕주의 시대를 살다 간 조폭 사형수

김형민 2021. 5. 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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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14일 서울목포파의 신출내기 조직폭력배들이 맘보파 조직원 4명을 살해했다. 그중 한 명인 고금석은 3년의 수감 기간 동안 뭇사람을 감동시키는 수형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85년 8월 서울 강남 룸살롱에서 맘보파 4명을 살해한 서울목포파 조직원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고금석.ⓒGoogle 갈무리

영화나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이니 너도 조직폭력배들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는 하고 있을 거야.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빈번하게 등장한 김두한(1918~1972)은 우리나라 근대적(?) 조직폭력배의 원조라 할 만하다. 김두한 시절만 해도 그들은 스스로를 ‘협객’이라 일컬었어. 협기(俠氣), 즉 용맹한 기상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뜻이야. 그들은 협객끼리 결투를 벌이고 그 승패에 따라 굴복하고 아우르는 것으로 그 싸움질을 미화했다. 덩달아 사람들도 ‘그때 그 주먹들은 주먹으로만 승부하는 낭만이 있었다’고 착각하지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 김두한의 똘마니이기도 했던 이정재가 ‘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이성순을 손도끼와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집단 린치했던, 1953년 동대문 린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지. 하기야 사람 협박해서 돈 뜯는 사람들에게 무슨 낭만이 있겠니.

그런데 한국이 고도성장 가도를 걷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직폭력의 양상은 심각하게 달라진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이권도 커지고 싸움은 치열해지며 기존 주먹들의 판도와 통념을 뚫고 새로운 세력도 출몰하게 마련이야. 일본 야쿠자와도 긴밀한 교류를 맺었던 신흥 조폭들은 몽둥이 정도가 아니라 일본도와 회칼을 휘두르는 냉혈한으로 역사에 등장하지. 협객을 자처하는 조폭의 마지막 세대라 할 명동 신상사파의 신년회장에 칼잡이들이 쳐들어왔던 1975년 명동 사보이호텔 습격 작전은 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겉으로라도 낭만을 내세우던 시절은 사라졌다고나 할까.

양은이파니 서방파니 OB파니 하는 신흥 조폭들이 서울 밤거리를 장악했고 그 뒤를 이어 꿈나무(?) 조폭들이 줄을 이었다. 영화 〈친구〉에 등장하는 유오성과 장동건은 부산의 대표적인 조폭 칠성파와 그에 맞서던 신20세기파 조직원이었던 실제 친구들을 모델로 한 것이지. 아빠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도 그들로부터 용돈 받으며 조직을 운영하던 두 ‘서클’이 있었을 정도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겠지? 이런 분위기에서 1986년 8월14일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진다.

서울 사당동의 한 정형외과 앞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 4명이 업혀 왔어. “교통사고 환자요!” 그런데 환자를 업고 온 보호자들은 마치 쌀가마를 부리듯 계단 앞에 환자를 내쳐버리고는 총총 사라졌다. 의사는 환자들을 보고 대경실색했어. 교통사고 환자가 아니었던 거야. 칼에 수없이 찔린 흔적이 역력한 그들은 곧 숨을 거두었어. 맘보파 조직원 4명의 최후였지. 그리고 ‘교통사고’를 일으킨 이들은 역시 서울목포파라는 신출내기 조직폭력배들이었어.

그야말로 생초보가 나름 이름난 깡패를 공격한 사건이었다고 해. 서울목포파는 유도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몇 명이 어울려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얼치기들이었지만 이들에게 당했던 맘보파 조직원들은 꽤 이름난 싸움꾼이었단 말이지. 어쨌든 이 잔인한 범죄 앞에 대한민국이 뒤집혔다. 신출내기 조폭들은 카메라 세례 와중에도 고개를 숙이거나 얼굴을 가리지 않고 공을 세운 듯 태연하게 포즈를 취해 사람들의 분노를 샀지. 검사의 논고 가운데 한 구절은 두고두고 우리말의 관용어구로 남아 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

그들 가운데 최종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건 두 명이었어. 그중 한 명인 고금석에게는 특이한 사연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낙도의 교감 선생님이었어. 또 고금석 자신도 고향에서는 평판이 좋은 청년이었다고 해. 끔찍한 범죄가 알려진 뒤에도 고향 사람들이 사형은 면하게 해보자고 구명운동에 나설 정도였다지. 그러나 평판 같은 건 아무 소용없었어. 대학에 진학한 이후 잘못된 길에 빠져든 고금석은 회칼을 들고 사람을 죽이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으니까.

1986년 8월 강남구 역삼동 서진룸살롱에서 일어난 조직폭력배 살인사건 현장검증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연합뉴스

하지만 만 3년의 수감 생활을 치르고 1989년 8월 사형대에 오르기까지 그는 뭇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수형 생활을 했다고 해. 독실한 불자로서 불우한 재소자의 사연을 들으면 반드시 도움을 주려 했지. 영치금을 모아 강원도 오지의 아이들을 후원했는데 그들의 답장을 받고 바다를 구경하는 게 아이들 소원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 그는 자신을 돌봐주던 박삼중 스님을 졸라 아이들의 해운대 여행을 도왔다는 사연도 있다. 그렇게 강원도 아이들을 휘몰고 놀러 간 해운대에서 박삼중 스님은 고금석의 사형 일정이 확정됐다는 소식을 듣게 돼. 제정신이 아닌 채 사형장에 도착한 박삼중 스님은 고금석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엉엉 울었고, 오히려 스님을 위로한 건 고금석이었어. “내가 스님 당뇨를 가져갈 테니 건강하게 사십시오.”

고금석에게는 또 특별한 사연이 하나 더 전해지고 있어. 앞에서 말했듯 교육자 집안에서 반듯하게 자라났던 그에게는 어릴 적 소꿉친구가 있었어. 그녀는 면회를 다니면서 고금석에게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됐다고 해. “면회를 다닐수록 금석이가 성자로 보여요.” 처음에는 구명을 호소했지만 그게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옥중 결혼을 청한다. 요즘같이 사형이 사실상 폐지된 시절도 아니고 툭하면 사형 집행 뉴스가 신문 귀퉁이에 실리던 시절이지만 철창 밖의 여자는 그 짧은 기간이나마 사형수의 아내이기를 갈망한다.

‘한탕 크게 저지르고 잘 먹고 잘살자’

하지만 사형수에게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어.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사랑을 한 여자의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러자 이 소꿉친구는 박삼중 스님에게 천만뜻밖의 말을 했다고 해. “스님, 저는 비구니가 되겠습니다. 비구니로 살면서 금석이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이 말이 고금석에게 전해지자 그는 다시 한번 모진 마음을 먹는다. “나 때문에 비구니가 된다니 더 이상 그 사람을 보지 않겠습니다.” 정히 자기를 버리지 못하겠다면 내가 그녀를 버려서라도 슬픈 인연을 끊겠다는 뜻이었지. 그리고 그녀와의 모든 면회를 거부해버렸다고 해. 둘의 인연은 결국 사형대에서 마무리된다. 고금석은 영치금 20만원을 자신이 후원하던 강원도 용소분교 아이들에게 남겼다고 해. 몇 년 전 그 용소분교가 폐교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어. 고금석이 세상에 남기고 간 뜻 하나도 이제 세월의 더미 속에 묻혀버린 셈이지. 하지만 그가 장기기증을 한 콩팥과 안구는 누군가에게 새 삶을 안겨주었을 거라고 믿는다.

아빠는 잔인한 살인자를 미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반성은 의무일 뿐, 그 죄의 무게를 덜 수는 없는 거니까. 다만 반듯한 교육자의 자식에다가 마을 사람들이 ‘죄는 미워도 살려는 보자’고 나설 만큼 평판 좋은 청년이 회칼 휘두르는 살인마로 전락한 세상에 대해서도 돌아봐야 할 것 같아. 조폭의 양상이 변모하던 시기와 맞물려 1970년대 말 이후 등장한 단어가 ‘한탕주의’다. ‘한탕’ 크게 저지르고 잘 먹고 잘살자는 불나방들의 모토였다고나 할까. 한탕주의는 고위 공무원부터 시장 골목 왈짜들까지 사로잡았고, 한탕으로 팔자를 고치는 사람들이 즐비했으며, 그 광경에 눈이 뒤집혀 한탕거리를 찾던 이들이 줄을 이었지. 이랬던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탕을 위해서 친구·선후배들과 문신을 새기고 칼춤을 추고 피비린내 따위는 돈 냄새에 묻어버리는 이들이 양산됐던 거야. 조폭에게 용돈을 받던 아빠의 고등학교 친구처럼. 영화 〈친구〉의 주인공들처럼. 그리고 고금석처럼. 그들은 그렇게 살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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