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를 비난한 죄? 자유를 위해 순교한 시민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21. 5. 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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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19일 하얼빈 50만 군중이 결집한 “헤이룽장성 무산계급이 자산계급을 멸절하는 조반 점화대회”에서 비투(批鬪)당하고 있는 문혁의 피해자. “극도의 반동, 사상개조를 거부하는 대규모 임대업자 위즈원(于滋文)”/ 李振盛, “紅色新聞兵”, 116쪽>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56회>

현직의 최고 권력자가 풍자 전단을 뿌린 무(無)권력의 일개 시민을 특정해서 명예훼손으로 처벌하려 했던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비판 세력을 위축시키기 위함일까? 사적인 모욕감을 못 견뎠기 때문일까? “최고 존엄”의 모독을 용납할 수 없는 측근 간신모리배의 과잉 충성이었을까?

법원, 검찰, 경찰의 수뇌부가 모두 최고 권력자의 사람들이다. 연약한 개인이 혼자 법정에서 최고 권력자를 이길 순 없다. 때문에 공화국의 시민들은 공동의 이슈가 떠오르면 집체적인 저항권을 행사한다. 수많은 시민들이 그 문제의 전단을 뿌리면서 “나를 잡아 가라!” 외친다면, 권력자는 궁지에 몰리고 만다.

실제로 언론의 거센 비판이 일면서 그런 조짐이 나타나자 권력자는 부랴부랴 고소를 취하했다.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려 했던 권력자의 소송대리전은 그렇게 유야무야 막을 내렸다. 무모한 최고 권력자의 KO패다. 2020년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왜 1960-7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을 재현하려 할까?

<문화혁명 중국 전역에서 벌어졌던 비투 대회의 전형적인 장면/ 공공부문>

일기장에 적은 내용 때문에 반혁명분자 몰려

문혁 시기 중국에서는 수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현행(現行) 반혁명분자”의 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대다수 정치범들은 단지 입을 열고 펜대를 놀렸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심한 경우 사형을 당했다.

그들에 들씌워진 죄명은 소위 “악공죄(惡攻罪)”였다. “악독하게 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을 공격하고” “악독하게 무산계급 사령부를 공격하고” “악독하게 사회주의제도를 공격한” 죄였다.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논설을 발표하거나 대자보를 써서 붙이며 적극적으로 저항한 사상범과 정치범들은 법망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들과는 달리 그저 일기장에 적은 한 두 마디 때문에, 실수로 내뱉은 한두 마디 때문에, 혹은 최고 영도자의 사진을 깔고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반혁명분자로 몰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희생자의 거의 대부분은 1980년 전후에서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과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주도한 “발란반정(撥亂反正, 혼란을 수습하고 정상을 회복함)”의 운동 과정에서 재심을 통해 누명을 벗었다. 1978년 이후 수년에 걸쳐 재조사해 원심의 판결이 뒤집힌 “발란반정”의 사례가 300만 건을 훌쩍 넘는다. 우선 지면의 제약 상 먼저 문혁의 광기 속에서 총살당해야만 했던 두 명의 “반혁명분자”를 간략히 소개한다.

마오쩌둥 비판 혈서 쓴 린자오(林昭) 총살당해

쑤저우(蘇州)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린자오(林昭, 1932-1968)는 16세부터 자발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지하 조직에 가담했다. 공산혁명에 매료된 린자오는 곧 영국 유학생 출신으로 국민당에 가담했던 부모를 등지고 집을 떠났다. 1949년 “해방” 직전 중국공산당 신문학교에 입학한 린자오는 1950년대 초기 토지개혁 당시 지주와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공산당원의 길을 갔다. 문재(文才)가 출중했던 그녀는 베이징 대학에 입학해서 중문과에서 언론학을 전공했다.

백화제방(百花齊放) 운동은 린자오를 정치적 죽음으로 밀어넣은 최초의 함정이었다. 마음 놓고 정부를 비판하라는 마오쩌둥의 양모(陽謨, 공공연한 음모)에 속은 린자오는 공산당의 문제점을 비판했고, 그 결과 이어지는 반우파 운동(1957-1959)에서 우파로 몰렸다. 1958년 9월 신장(新彊)에서 노동개조의 도형에 처해진 그녀는 신병(身病) 때문에 이듬 해 봄 상하이로 이송됐다.

<왼쪽: 미국 듀크 신학대학의 시롄 교수가 편찬한 린자오 전기 “혈서(Blood Letters)의 표지. 오른쪽: 린자오의 마지막 사진 (1962), 같은 책에서 발췌>

린자오는 1960년에는 대기근을 비판하는 지하 언론 <<성화星火>>창간호에 두 편의 저항시를 실렸다. 1960년 10월, 린자오는 20년 형을 선고받고 다시 투옥됐다. 병세 악화로 1962년 초 보석으로 풀려난 린자오는 “중국 자유청년 전투 동맹”의 강령과 헌장의 초안을 작성하는 대담한 투쟁을 이어갔고, 1962년 12월 다시 투옥됐다. 질세라 린자오는 계속되는 단식 투쟁과 자살 시도로 저항했다. 아울러 스스로 무죄라 주장하는 항의서를 써서 언론사에 투고했다. 1964년 린자오는 혈서로 스스로의 묘비명을 썼다.

1965년 5월 상하이 징안(靜安)구 인민법원에선 “반혁명죄”로 린자오에 도형(徒刑) 20년을 선고했다. 이후 옥중에서 린자오는 머리핀에 피를 찍어서 혈서(血書), 시가(詩歌), 일기(日記)를 쓰고, 과격한 반혁명의 구호를 외쳐댔다. 1966년 말 마오쩌둥의 인격숭배가 하늘을 찌를 때, 린자오는 더욱 강력하게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혈서를 썼다. 재판부의 기록에 따르면 린자오는 마오쩌둥을 “미친 듯이 공격하고, 저주하고, 모독했다.” 결국 1968년 4월 29일, 중국인민해방군 상하이시 공·검·법 군사관제위원회는 린자오에 “사형, 즉시집행”을 언도했다. 총살당한 후 시신이 불태워져 폐기됐음에도 린자오의 부모에겐 아무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이후 린자오의 총살에 사용된 총알 비용의 청구서를 받고서야 가족들은 그녀의 사망을 알게 됐다.

12년이 지난 1980년 8월 22일, 상하이시 고급 인민법원은 재심을 통해서 린자오의 처형은 원통하게 무고한 사람을 죽인 “원살무고(冤殺無辜)”의 사건으로 판결했다. 이 판결문을 잘 읽어 보면 린자오가 “1959년 8월부터 정신병을 앓았기 때문에” 이후 린자오가 작성한 모든 글은 범죄로 성립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듬해 1981년 12월 30일, 상하이시 고급 인민법원은 “정신병”을 이유로 린자오에 무죄를 선고한 1980년의 법정의 판결 역시도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린자오의 “반혁명행위”는 정신착란의 증세가 아니라 신념에 찬 정치적 표현임을, 합법적 투쟁이었음을 법원이 인정한 셈이었다.

<린자오의 옥중 수고(手稿), 1967넌 10월 24일, 사언시 “체포 7주년의 구호”/ Lian Xi, “Blood Letters”에서>

“오늘날 공산당은 특권층” 외친 왕페이잉 즉각 사형

린자오의 죽음은 문혁 시절 계속된 정부에 의한 정치범 학살의 신호탄이었다. 1970년 1월 베이징 일타삼반 운동에서 최초의 순교자는 왕페이잉이었다. 허난성 카이펑 출신의 왕페이잉은 젊고 야심찬 지식인 출신 린자오와는 달리 철도부 철도 전문설계원의 직공으로 1934년 결혼해서 8남매를 낳아 기른 평범한 중년의 여인이었다.

1949년 허난성 정저우의 우체국에서 일을 시작한 왕페이잉은 같은 해 철도국의 비서실로 전출됐다. 1952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1955년 베이징으로 이주한 왕페이잉은 철도부 공장 설계사무소 탁아소에서 보육원으로 근무했다. 1960년 남편과 사별한 후, 왕페이잉은 박봉에 시달리며 대가족의 살림을 꾸리면서도 마오쩌둥의 백자(白瓷)상을 사서 집안에 모셔놓을 만큼 신실한 공산주의자였다.

<1950년대 단란했던 왕페이잉의 가족. 왕페이잉은 8남매를 낳아 기른 평범한 어머니였다. 중국 대륙의 비판적 영화감독 후지에의 다큐멘터리 “내 어머니 왕페이잉”에 삽입된 사진. https://www.chinaindiefilm.org/films/my-mother-wang-peiying/>

왕페이잉의 재판 기록에 따르면, 대기근(1958-1962)의 참사 이후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정치적 대립이 대중에 알려질 때, 그녀는 류샤오치를 적극 지지했다. 그녀는 “마오쩌둥이 지금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퇴로가 없다”고 생각했다. 1965년 이후 왕페이잉은 공개적으로 류샤오치, 흐루쇼프를 지지하고,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1965년 4월 왕페이잉은 공산당 탈당 의사를 밝혔다. 그녀는 “과거의 공산당원은 인류의 해방을 위해 고뇌했는데, 오늘날 공산당은 높은 관직과 녹봉을 받는 특권층이 됐다”며 공개적인 탈당의사를 제출했다.

1968년 청계운동이 시작되자 왕페이잉은 곧 철도부의 우붕(牛棚)에 갇혀 가혹한 사상개조의 고문과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신세가 됐다. 놀랍게도 왕페이잉은 국가폭력 앞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사상개조를 거부했다. 1968년 10월 중공중앙이 전임 국가주석 류샤오치에 탈당 조치를 취할 무렵이었다. 왕페이잉은 1968년 9월 9일, 9월 30일, 10월 4일 세 번에 걸쳐 우붕의 식당 안에서 목청이 터져라 “류샤오치 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왕페이잉은 과감하고도 무모한 저항을 이어갔다. 공산당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고, 마오쩌둥의 실정과 독단을 질타했다.

“인민의 죄인이 되기 싫어서 탈당을 원하노라! 공산당은 비록 혁명의 공이 있지만, 이제 승리에 도취해 이성을 잃고 전진을 멈추고, 이미 인민의 머리 위에 서서 인민을 압박한다!”

결국 왕페이잉은 1968년 10월 21일 베이징시 공안국 군사관제위원회에 의해 “현행 반혁명”의 죄명으로 체포됐다. 1969년 하반기 왕페이잉은 베이징 시가지 곳곳을 끌려 다니며 군중 앞에서 인격살해의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왕페이잉은 간부들이 입을 벌리고 벽돌을 쑤셔 넣어 턱뼈가 깨지고 빠지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1970년 1월 27일 베이징 공인 체육장(노동자 운동장)에서 거행된 공판대회에서 왕페이잉은 “사형, 즉각 처형”을 언도받았고, 바로 그날 유명한 베이징 루거우차우(盧溝橋)의 처형장에서 총살당했다. 그날 선포된 판결문에는 다음 내용이 있다.

“왕은 완고히 반동의 입장을 고수했다. 1964년에서 1968년 10월까지 1900여 개의 반혁명 표어를 짓고, 30여 편의 반동 시가를 쓰고, 공개적으로 톈안먼 광장, 시단 상가 및 기관의 식당 등 공개장소에서 여러 차례 군중을 향해 반혁명 구호를 외쳤으며, 극도로 악독하게 무산계급 사령부와 중국 사회주의 제도를 공격하고 모멸했다. 왕은 구금상태에서도 인민을 적으로 삼고, 미친 듯이 공산당을 저주했다. 반혁명의 광기가 극에 달했다.”

1980년 베이징시 중급 인민법원은 재심을 통해 왕페이핑의 무죄를 판결했다. 역시나 정신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반혁명죄가 성립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2011년 6월 9일, 베이징시 고급 인민법원은 정신분열증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1980년 판결을 철회했다. 왕페이잉의 저항은 정신병 증세가 아니라 신념에 따른 정치적 저항이었음을 41년 후에야 법원이 나서서 공인한 사건이다.

<린자오와 왕페이잉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난징에 거주하는 비판적 영화감독이자 화가 후지에(1958- ), 2015년 사진. https://www.nybooks.com/daily/2015/05/27/chinas-invisible-history-hu-jie/>

린자오와 왕페이잉은 문혁의 광기 속에서도 국가폭력에 저항했던 자유의 순교자들이었다. 중국 대륙의 비판적 영화감독 후지에(胡杰, 1958- )는 이 두 사람의 일대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린자오의 영혼을 찾아서”(Searching for Lin Zhao’s Soul, 2004)와 “내 어머니 왕페이잉”(My Mother Wang Peiying, 2011)을 제작했다. 물론 문혁의 절정에서 안타깝게 희생됐던 자유의 순교자들을 통해 중공정부의 인권유린과 정치범죄를 고발한 이 두 기록영화는 현재 중국에선 상영 금지돼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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