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도서관] 세상 밑그림을 그리는 가냘픈 한 자루
연필|김혜은 지음|향|44쪽|1만5000원
칼로 연필을 깎는다. 연필밥이 떨어진다. 어쩐지 갸름한 나뭇잎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지가 돋는다. 색색의 나무들이 솟아나 무성한 숲을 이룬다.
그림책 작가인 저자는 연필을 깎으며 숲과 나무를 생각했을 것이다. 상상은 점점 크게 뻗어나간다. 동물과 새들의 보금자리가 돼 주던 나무들이 바람에 쓰러진다. 꺾인 나무들이 공장으로 간다. 거대한 회색 공장 앞에서도 트럭에 실린 나무들은 저마다 색을 유지하고 있다. 그 모습은 애처롭지만 언젠가 잿빛의 세상이 다시 천연색으로 물드는 날이 오리라는 암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나무들은 다시 연필로 만들어진다. 가게에서 색연필 한 자루를 집어든 소녀가 밑둥치만 남은 나무에 다시 줄기와 가지를 그려넣는다. 조금씩 색을 회복하기 시작한 숲에 다시 동물과 새들이 찾아온다.
연필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고, 그렇게 만든 연필로 다시 숲을 그린다. 이 선순환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연필은 자유로운 가능성을 상징하지만 그 가능성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연필을 쥔 손이다. 나무가 잘려나간 숲에 어떤 세상을 그릴지는 소녀의 손에 달려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한 자루의 가냘픈 연필이 세상의 밑그림을 그린다.
마지막 장면. 소녀는 생기를 되찾기 시작한 숲 가장자리에 묘목처럼 연필을 심는다. 이 연필은 어떤 모습이 될까. 크고 울창한 나무로 자라나 연필숲을 이룰까. 독자가 상상해야 할 몫이다. 글이 없는 이 책에서 그림만으로도 메시지는 분명하게 전해져 온다. 그리고 책에 나오는 그림은 모두 연필로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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