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선박 대란]② 글로벌 선사들 덩치 키우는데, 韓은 아직도 '복구 중'
한국은 한진해운 파산 전 수준 회복에 급급
수출기업들이 선박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운임 부담으로 공장가동을 멈추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 ‘한진해운 사태’ 당시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해운업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산업계 목소리가 묵살됐고, 그 여파가 코로나 사태를 만나 수출대란으로 돌아왔다. 해운산업이 정상화되지 않으면 경제 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한국 해운산업의 실태를 짚어보고 해운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방안을 찾아본다. [편집자주]
“40년 가꾼 회사(한진해운)를 날리고, 4년만에 복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만하거나 바보이거나 둘 중 하나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지금 상황에서 한진해운이 있었다면 해운 경쟁력이나 수출 측면 모두 더 나았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컨테이너선 운임이 치솟으면서 ‘수출 대란’이 이어지자 업계에선 4년전 사라진 한진해운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여전하다. 글로벌 선사들은 실적 강세를 바탕으로 경쟁적으로 규모 확대에 나서고 있는데 한국은 한진해운 파산 전 수준을 복구하기에 급급한 상태다.
◇ 프랑스 선사, 컨테이너선 한번에 22척 발주
7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프랑스 선사 CMA CGM은 최근 중국선박공업(CSSC)에 컨테이너 22척을 발주했다. 1만5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6척, 1만3000TEU급 6척, 5500TEU급 10척 등으로 2023년~2024년에 인도받을 예정이다. CMA CGM의 현재 총 선복량(적재능력)은 약 300만TEU인데, 인도받을 예정인 컨테이너선 선복량이 55만TEU가 넘는다. 선복량 기준 세계 3위 자리를 공고히할 전망이다.
다른 선사들도 몸집을 키우고 있다. 스위스 선사 MSC도 지난달 1만6000TEU급 컨테이너선 13척을 발주했다. MSC는 신조선 발주량만 63만5000TEU다. 현재 총 선복량 393만TEU인 상황에서 선박을 모두 받으면 글로벌 1위 선사인 덴마크의 머스크보다 규모가 커지게 된다.
대만 선사 에버그린도 신조선 발주량이 69만TEU에 달한다. 모두 인도받으면 글로벌 톱5로 도약하게 된다. 중국 코스코(27만6000TEU)와 독일 하팍로이드(14만1600TEU), 일본 ONE(26만6000TEU) 등도 모두 컨테이너선 발주에 나서고 있다.
반면 국내 해운업계는 아직도 한진해운 사태에서 회복 중이다. 국적 원양선사인 HMM(011200)은 다음달까지 1만6000TEU급 컨테이너선을 모두 인도받더라도 총 선복량이 95만TEU에 불과하다. 한진해운 파산 전 수준을 밑돈다. 2022년까지 배를 빌리는 용선 등의 방식으로 100만TEU까지 늘리는 것이 목표다.
해양수산부도 오는 6월 HMM이 1만3000TEU급 컨테이너선 10척가량을 추가로 발주할 수 있는 지원 정책을 마련할 예정이지만, 이마저도 기획재정부나 산업은행 등과 협의가 필요해 그 규모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 글로벌 선사, 물류 인프라 확대하는데... 국내는 계획조차 없어
글로벌 해운업계 서비스 경쟁도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글로벌 선사들은 ‘엔드 투 엔드(끝에서 끝)’로 대표되는 물류통합화 전략을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만 제자리걸음이다.
MSC는 최근 아시아 지역의 복합운송서비스를 발표했다. 부산이나 일본 요코하마 등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컨테이너선을 활용해 옮긴 뒤 대륙간 철도를 통해 상트페테부르크까지 운송하는 것이다. 철도 운송의 비용이 비싸다는게 그동안 흠이었지만 컨테이너선 운임이 뛰면서 오히려 안정적인 운송이 가능하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CMA CGM은 화물기전용법인을 설립하고 지난 2월 카타르항공으로부터 화물기 A330-200F 4대를 구매했다. 해운업을 넘어 항공화물 시장까지 진출하는 것이다. 머스크도 각 지역 물류회사를 인수·합병(M&A)하는 전략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국내 해운업계는 이렇다할 계획조차 없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은 ‘글로벌 선사들의 물류통합화 전략에 대한 국적선사의 대응방안’ 연구보고서를 통해 “국내 해운·물류기업들의 자산 및 역량 확대에 대한 계획을 살펴보면, 선박을 제외하고 전반적으로 특별한 확보 계획이 없다”고 평가했다. 또 “인력 측면에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확보할 구체적인 계획이 없고, 영업플랫폼에 있어서도 이를 주도적으로 구축해 전체 물류 프로세스를 주도해 나갈 의지도 부족한 실정이다”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물류통합에 대해 국내 해운·물류기업의 대응자세와 준비가 크게 미흡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특히 글로벌 선사들과 물류 기업들이 물류플랫폼 구축과 물류인프라 확대를 통해 통합물류사업자로 발전하는 것에 비해, 국내 해운·물류기업들의 준비가 크게 부족한 것”이라고 했다.
◇ “한진해운의 ‘네트워크’ 한순간에 날려... 회복 쉽지 않을 것”
해운업계에선 여전히 한진해운 사태의 그림자가 짙다고 말한다. 국내 1위‧세계 7위 컨테이너 선사였던 한진해운은 2016년 8월 30일 자율협약 종료 결정이 내려지고 이튿날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기업 정상화보다 재무 개선에 방점이 찍히면서 한진해운은 주요 자산인 선박은 물론 미국 롱비치항 터미널 등 알짜 자산까지 모두 외국 선사들에 넘겨줘야 했다. 1300여명의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회생 가능성은 더 줄었고 결국 2017년 2월 파산했다. 한진해운 출신 한 관계자는 “당시 정부는 오너 일가의 경영 문제만 지목했지만, 해운사가 사라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한진해운 파산 이후 글로벌 해운시장은 과점체제가 됐다. 머스크 등 대형 선사들이 출혈 경쟁을 벌이며 점유율을 확대하는 전략이 먹혀들어간 것이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2016년 8월 선복량(적재능력) 20만TEU 이상이었던 글로벌 선사는 18곳이었지만 현재는 12곳만 남았다. 4대 얼라이언스(해운동맹)는 이제 2M(머스크·MSC), 오션(CMA CGM·COSCO·에버그린), 디(하팍로이드·ONE·HMM·양밍) 등 3대 얼라이언스로 재편됐다.
이같은 구조가 최근의 컨테이너선 고운임의 한 원인이라는게 중론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선사들이 운임이 급락하면 계선(운항을 중단한 선박)규모를 늘리고, 운임이 오르면 선박을 집중 투입하는 식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며 “앞으로도 비슷한 방식으로 운임을 방어해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의 입장에선 그만큼 물류비 부담에 오랜기간 시달려야 한다는 의미다. HMM이 그나마 지난해 디 얼라이언스 정회원이 됐지만, 여전히 규모 등의 한계로 얼라이언스 내 입지가 크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한진해운 파산으로 사라진 ‘네트워크’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유다.
대형 종합물류기업 관계자는 “글로벌 물류의 90%는 ‘네트워크’인데 한진해운이 오랜 시간 쌓아올린 이 자산을 우리나라는 한 순간에 잃어버렸다”며 “배를 짓고 사는 문제보다 이 네트워크를 회복하기 쉽지 않은 것이 더 뼈아프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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