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통지서도 받을 수 없었던 어느 아나운서의 '해고'
2015년 프리랜서 입사 후 '라디오·리포트·회사 행사'까지 했지만…
UBC 아나운서 "이유 없는 해고" UBC 측 "프리랜서 계약, 해고 아냐"
[미디어오늘 박서연 기자]
울산 민영방송 울산방송(UBC)의 아나운서인 이미연씨(30·가명)는 4일 UBC를 상대로 울산지방노동위원회(울산지노위)에 “원직에 복직시키고 해고 기간 정상적으로 근무했다면 받을 수 있었던 금액을 지급하라”는 요구를 담은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4월4일 '해고'된 미연씨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앞으로 뉴스(모닝와이드 앵커) 업무를 줄 수 없다. 뉴스를 하지 않으면 경제적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 다른 데로 옮길 수 있어? 혹시 결혼 계획은 없니? 나한테만 솔직하게 말해봐.” 미연씨는 지난해 11월30일 이아무개 취재팀장으로부터 이 같은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해고. 대화를 나눌 당시만 해도 이씨의 머릿속엔 이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날 미연씨는 이 팀장에게 “굉장히 부당한 조치”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2일 이 팀장은 “(계약 종료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니) 이제부터 회사와 미연씨의 절충안으로 미연씨를 내년 3월까지 다시 평가하겠다”고 말했고, 미연씨는 “동의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이 팀장은 “그동안 못 보여준 게 있다면 더 보여달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 팀장은 이어 “절충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12월까지만 일하는 거로 해서 계약을 해지할 테니 불만 품지 말라”고 말했고, 해고통지서를 달라는 미연씨의 말에 '계약 종료'이기 때문에 해고통지서를 줄 수 없다고 했다.
“오늘부터 오독 개수 세겠다”
“너도 대전MBC 아나운서들이랑 같은 처지라고 생각해?” UBC에서 일한 지 딱 5년이 되던 날인 지난해 12월 10일 박아무개 당시 UBC 이사는 분장실에서 '이미연의 잠 못드는 밤, 그대는' 라디오 프로그램 방송 녹음을 하려고 대기 중인 미연씨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 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시 미연씨는 대전MBC 여성 아나운서들의 이슈를 알지 못해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다.
대전MBC 여성 아나운서들은 2019년 6월18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여성 아나운서들이 남성 아나운서와 같은 업무를 하지만 프리랜서로 고용됐다는 이유로 임금과 연차 소진 등을 차별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년 뒤인 지난해 6월17일 인권위는 대전MBC에 성차별 채용 관행 해소 대책을 마련할 것과 여성 아나운서들에 대한 정규직 전환을 촉구하는 권고안을 발표했다. [관련 기사 : 대전MBC 아나운서들 “남녀차별 인권위 진정”]
박 이사는 '해고'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다고 번복한 뒤 “내년 7월까지 너를 재평가하겠다”라고 말했고, 미연씨는 “싫다”고 했다. 박 이사는 “다른 평가 요소들은 주관적이니 일단 오늘부터 오독 개수를 셀 것”이라고 말했다. 미연씨는 이날의 대화 내용을 모두 노트에 기록했다.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늘 하던 뉴스 진행이 부담되기 시작했다. 잠드는 게 어려웠고,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스튜디오에 있는 게 힘들었다. 탈모 증상까지 생겼다. 지난해 12월28일부터 울산근로자건강센터에서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치료의 목적으로 매일 '행복일기'를 쓴다.
프리랜서 기상캐스터로 입사, 라디오 진행·리포트·회사 행사까지
미연씨는 2015년 12월10일 UBC 보도국 소속 '프리랜서 기상캐스터'로 입사했다. '방송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품고 대학 졸업도 하기 전 입사했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서류 전형 및 면접, 카메라 테스트 등을 통과해 채용됐다. 미연씨는 지난해 7월6일부터 뉴스 진행 아나운서로 직무가 바뀌었다. '기상캐스터'라는 직무가 없어지자, '아나운서' 역할을 맡게 된 것.
휴가도 마음대로 쓰지 못했다. 회사는 미연씨에게 상반기와 하반기 각각 5일씩의 휴가를 부여했다. 휴가 사용 시기는 제약이 컸다. 다른 아나운서들과 간격을 두고 사용하게 하거나 창립기념일과 공휴일에는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특히 회사는 기상캐스터가 앵커 진행을 바로 맡게 되면 이상하다는 이유로 지난해 6월29일부터 7월3일까지 휴가를 지정했다. 닷새간의 휴가도 온전히 쉬지 못했다. 휴가 기간 중 이틀 동안 출근해 뉴스 리허설을 진행하라는 회사 지시에 응하기도 했다.
회사는 '프리랜서' 계약이라 주장하지만, 필요한 모든 곳에 미연씨를 '투입'했다. 기상캐스터와 아나운서 업무를 하면서 라디오 진행, 리포트 제작(취재 및 기사 작성), 프로그램 출연, 회사 행사(UBC 글로벌 기자단, UBC 아카데미 3기) 등 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이 같은 업무에서 상사의 지시가 있었다.
'근로계약서' 한번 받은 적 없지만, 일할 땐 회사 '직원'처럼 일했다. 프리랜서란 일정한 집단이나 회사에 전속되지 않은 자유기고가나 배우 또는 자유계약에 의해 일하는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미연씨는 회사 일만 하기도 바빠 UBC에 재직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곳에서 소득 활동을 하지 못했다.
UBC의 '이미연 아나운서' 흔적 지우기
미연씨 '해고'에 대해 사측은 여러 번 입장을 바꿨다. 지난 2월2일 이아무개 보도국장은 부서 이동을 약속했다. 지난해 11월30일 미연씨에게 처음으로 '해고' 이야기를 꺼낸 이아무개 취재팀장이 없는 편집제작팀으로 이동해주겠다는 것. 부서를 이동한 미연씨는 지난 2월26일 장아무개 편집제작팀장에게 재차 해고통보를 받았고, 이번엔 이아무개 보도국장 역시 지난 3월2일 오는 4월5일쯤 해고될 거라고 말했다.
지난 1월부터 회사는 '이미연' 흔적 지우기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점점 그를 피했다. 지난 1월5일 회사는 미연씨를 주말 뉴스인 'UBC 프라임 뉴스' 진행 당직에서 배제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아나운서 4명은 주말 뉴스 진행을 주마다 돌아가며 맡는다. 뉴스 배제 시도는 당시에는 철회됐지만, 미연씨는 3월13일(토)과 14일(일)까지만 일했다.
UBC 홈페이지 '아나운서 소개'란에 미연씨 정보가 삭제됐다가 재등록되기도 했다. UBC는 지난 1월11일 미연씨를 정보 소개란에서 삭제했다. 시청자 A씨가 지난 2월10일 '시청자 게시판'에 “아나운서 소개에 이미연 UBC 아나운서가 있었는데요. 아나운서 소개 페이지에 없더라고요”라고 문의했고, 관리자는 “진행자 등의 개인 사정 등으로 진행자 구성에 변동이 있어서 레이아웃의 변경이 있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당시 '아나운서 소개'란에는 미연씨만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미연씨 정보는 시청자 문의 이후 복구됐다. 지난달 4일 미연씨가 해고되자 결국 미연씨는 다시 사라졌다.
UBC “프리랜서 계약 관계, 해고 성립 안 돼”
UBC 관계자는 “당초 프리랜서 계약 시 기상캐스터가 기본 업무였지만, 주 1회 생활 정보아이템 제작, 라디오 진행도 합의했다. 이외 이씨의 동의 아래 UBC 글로벌기자단에서는 전문강사, UBC 아카데미에서는 MC 역할을 해 대가를 용역비로 제공했다”고 설명한 뒤 “이씨는 프리랜서로 업무를 진행했으며 (이씨 주장과 달리) 뉴스 개편에 따른 진행자 교체다. 해고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씨를 향해 '재평가 하겠다'고 말한 의미에 대해 UBC 관계자는 “지난해 7월 뉴스 프로그램 개편으로 기상 정보를 폐지하면서 상호 협의해 이씨가 아침뉴스 진행 업무를 했다. 이후 더 좋은 뉴스 진행을 위해 애 써달라는 당부의 의미로 말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승현 노무사(노무법인 시선)는 “방송업계는 아나운서 등 이른바 선망직종 노동자를 채용해 장기간 지휘 감독하에 일하게 해도 업무 특성을 이유로 노동자임을 부인한다. 그러나 정규직 방송 노동자 역시 대부분 스케줄 근무, 방송제작에 (사측이 업무에) 상당수 재량권을 갖는다는 점을 볼 때 이를 이유로 노동자성을 부인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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