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반대' 내세운 백래시, 경찰은 왜 타협하나

박고은 2021. 5. 5. 17:2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차별과 혐오 행위에 선긋는 공적 기준 필요
'확대재생산 스피커' 정치인 · 언론도 문제
게티이미지뱅크
#1. 지난달 서울시자살예방센터 홈페이지가 일부 남성 누리꾼의 공격을 받았다. 센터가 20대 여성 대상 자살 예방 사업 ‘시스터즈 키퍼스’를 진행한다는 이유였다. “왜 여자만 지원하느냐”며 남성 역차별이라고 주장했다. 이틀 사이 온라인 게시판에는 800건 넘는 혐오글이 올라왔고, 해킹 시도로 홈페이지가 다운되기도 했다. 센터는 게시판 글쓰기 기능을 중지하고 공지글로 입장을 밝혔다.
“최근 일부 네티즌분들의 사회 통념을 넘어서는 게시 행위로 인해 매우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음을 알리며, 혐오성 발언과 사진 게재 등을 중단해주길 당부한다.… 심각한 사이버테러 행위에 대해서는 법적 대응 필요성을 검토 중이다.”

#2. 방송인 박나래가 3월23일 웹예능 ‘헤이나래’에서 인형을 두고 성적으로 희롱하는 언행을 했다며 한 누리꾼이 박씨를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불법정보유통)로 고발장을 냈다. 이 법에서 다루는 불법정보유통은 ‘음란한 영상을 배포하거나 공공연하게 전시’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성착취물, 불법유통 해외 음란물이 대상이다. 수위가 높았다거나 부적절하다는 비판은 몰라도 형사처벌은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게다가 케이블TV 등에서 이른바 ‘섹드립’을 하는 남성 연예인에 견주면 그 수위가 높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고발장을 접수한 서울강북경찰서는 수사 필요성이 떨어져 각하 가능성이 큰 사안을 지나치게 ‘대접’하고 있다. “영상 등을 확인해 박씨에게 형사처벌이 가능한지 등을 검토하겠다”며 고발인 조사도 마쳤다.

성평등 사회로 변화하는 데 반발하는 백래시(반발성 공격)가 잇따르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는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수십년 전부터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대응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백래시에 대한 대응은 크게 두 가지다. 사회통념을 넘어선 문제 제기에 명확히 선을 긋고 단호하게 대처하거나(1번 사례), 성차별과 혐오를 내세운 이들의 의견을 일단 받아들이거나(2번 사례).

전문가들은 전형적인 백래시 현상에 타협해선 안 된다고 했다. 기본권 침해 등에 분명하게 선 긋는 공적 기준과 이에 따른 명확한 제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특히 경찰 등 공공기관이 원칙없이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백래시를 하는 이들에게 긍정적 시그널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원칙 없는 대응, 잘못된 메시지 줄 수 있어”

최근 잇따라 나타난 백래시는 일반적 사례에 가깝다. 언론이 여과없이 일부의 주장을 퍼다나르며 화제성을 높였지만, 성평등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처음 등장한게 아니다. ‘용어의 재정의’라는 프레임 전쟁은 페미니즘 백래시에 등장하는 전형적 요소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장은 그의 책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에서 “198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페미니즘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의 수뇌부였던 뉴라이트 남성이 우선 언어를 장악하는 전략을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무기로 내세운 개념과 의미를 재정의하는 것, 이보다 더 효율적인 전략은 없다”고 썼다.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백래시도 ‘페미니즘 재정의’ 전쟁 양상이다. 성평등 반대 집단은 ‘페미니즘=메갈리아’라는 프레임을 퍼뜨린다. 지금은 문 닫은 온라인 사이트 메갈리아 이용자들은 미러링(상대방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기)을 통해 여성혐오 표현을 비틀어 남성에게 돌려줬고, 불법촬영 근절이나 성착취물 유통 사이트 폐쇄 등을 요구했다. 백래시 가담자들은 메갈리아를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는 남성혐오 및 범죄 인터넷 커뮤니티로 여긴다. 극우성향 온라인 사이트 ‘일베’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백래시 가담자 일부는 메갈리아가 사용했던 남성비하 표식인 ‘집게 손가락’ 이미지 색출에 몰두했다. 지난주 편의점 지에스(GS)25와 경찰청 홍보물에 손가락 이미지를 찾아낸 이들은 민간기업과 경찰 내부에 ‘메갈리아가 침투했다’고 주장했다.

최근 논란이 된 지에스(GS)25와 경찰청의 홍보 포스터.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새로운 것 없는 최근의 백래시가 심각한 문제가 된 건 성평등에 반대하는 일부의 공격이 너무 쉽게 받아들여 지고 있어서다. 소비자 반응에 민감한 지에스25는 곧바로 포스터를 삭제했고 공식사과까지 했다. 시민 인권과 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경찰 역시 별다른 검토 없이 곧바로 홍보물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책 <한국, 남자>를 쓴 사회학자 최태섭은 “백래시 가담자들이 원하는 건 이같은 효능감”이라고 했다.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일도 키워서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게 목적이다. 사기업이든 정부기관이든 문제를 회피하려다 보니, 아무리 황당한 요구를 해도 소비자 불만 을 처리하듯 수용하고 만다. 원칙 없는 대응은 사회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어 위험하다.”

권력기관인 경찰청이 홍보 포스터 수정 의사를 밝힌 건 정부에도 이런 억지가 통한다는 걸 증명해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황연주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사무국장은 “공공기관은 민원에 취약할 수밖에 없지만, 이런 식으로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허위 주장을 하나의 의견인 것처럼 받아주다 보면 공공기관 전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 인스타그램 계정 갈무리

 ‘혐오의 확성기’가 된 정치인들

성평등을 막아선 목소리를 확대재생산하는 정치권과 언론이 백래시 가담자들의 확성기 구실을 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손희정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 간의 문제로 만들고, 갈등을 심화하는 방법으로 인기를 얻으려 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이런 정치는 남성의 삶을 개선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정치인들이 바로 해로운 정치인”이라며 미국 뉴욕대 정신과 교수 제임스 길리건의 책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내용을 소개했다. 미국 사회에서 살인율과 자살률은 공화당 집권기에 늘고, 민주당 집권기에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났다. 원인은 정치의 차이였다. 공화당은 개인 노력을 강조해 경쟁을 부추겼고 소수자를 배제해 다수의 결속을 다졌다. 갈등을 부추긴 정치가 만연한 미국 사회에서 폭력과 살인, 자살이 늘었다는 것이다.

백래시는 앞으로도 나타날 것이다. 중요한 건 백래시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한 공적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최태섭 작가는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타협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보편타당한 공익과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차별과 혐오 행위에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우리 사회가 백래시에 쉽게 휘둘리는 것은 “가치 기준이 없어 정치가 의미 없는 트롤링(관심유발 행위)에 휘둘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성계는 “정치권, 수사기관, 법원, 학교, 기업은 비상식적 백래시를 명확하게 제지하라”고 요구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4일 박나래씨에 대한 경찰 수사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입장문을 냈다.

“본질은 성희롱이 아니다. 성평등에 대한 백래시이자 여성 연예인에 대한 괴롭힘이다. ‘성희롱’이라는 비판은 이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명목에 지나지 않는다. 백래시를 용인하면 성별 불평등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억지 논란을 받아들여 백래시에 힘을 실어주는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

박고은 이주빈 기자 euni@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