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시집 천양희 "마침내 할 일은 죽기 살기로 세상을 그리워해 보는 것이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제 시를 좋게 보는 분들이 반전을 기가 막히게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것이야말로 시인의 할 일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고 해도 살고 있는 한, 세상은 그리운 것이죠.”
천 시인을 지난달 28일 수락산역 인근 커피숍에서 만났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시인은 그대로인 듯 했지만, ‘젊은 기자’는 간데없고 대신 머리도 조금 빠지고 기억력도 쇠퇴한 ‘선임 기자’만 앞에 서 있었다.
―시 「마침내」에서 “하루에도 사계절이 있다”고 했는데요.
“하루에도, 아침저녁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 봄 같기도 하고, 삶이 잘 풀리지 않을 땐 여름, 쓸쓸하면 가을이 되고, 꽁꽁 얼어 내 속으로 갇히면 겨울이 오죠. 시인이 어떤 의미에서 변덕쟁이입니다. 민감해야 하고 변화를 자주 느껴야 하지요. 사계절을 맞아야 새 감각이 생기고, 사계절이 있어야 제가 먼저 변합니다.”
많은 시편에서 더 깊어진 사유와 따뜻하고도 서늘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시 「의외의 대답」은 인간의 존재 의미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을 시적으로 잘 담아낸 절창.
―“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은 쓰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요.
“고통이란 다 다르고 개별적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너와 나의 고통이 같다고 하는데, 고통은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라고 하면 안되지요. 고통은 각자의 것이고, 각자 느끼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고통의 질은 다 다르고, 각자 절대적이죠. 보편화시키면 안됩니다.”
시 「있다」의 끝 부문에도 엇비슷한 내용이 담겼다. “함께 있어도 거리를 지키는 벼가 있다/ 우짖음으로 자신을 지키는 새가 있다/ 울음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벌레가 있다/ 하루에 몇 십만 번씩 물결치는 파도가 있다/ 물살이 역류하는 개울이 있다/ 나무 위에 사는 나무가 있다/ 잎 끝에 돌기를 가진 꽃이 있다/ 한평생 물 안 먹는 짐승이 있다/ 죽어가면서 빛을 달라고 한 사람이 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내가 있다”(「있다」 전문)
시인은 벼, 새, 벌레, 파도, 개울, 나무, 꽃, 짐승, 사람 등을 노래하고선 왜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내가 있다”고 했느냐고 묻자 사람, 특히 여자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답한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넓은 집 뒤에는 들이 있고, 감나무나 유실수, 치자나무 등이 있었으며, 앞에는 개울도 있었지요. 거기에서 물장구도 치고. 저녁에 모기가 많아 모닥불을 피우곤 했습니다. 별이 우수수 쏟아지곤 했어요. 제가 여섯 살 때, 제가 돌아가신 작은 오빠에게 이렇더래요. 나 죽으면 별이 될란다. 오빠가 야단을 쳤다고 하더라고요. 어린 것이 죽는 것부터 말하느냐, 어린 것이. 오빠가 소름이 끼쳤다고 전해주더군요.”
천 시인은 상당수 시편에서 시의 힘과 시인들을 노래했다. 시 「사소한 한마디」의 이야기는 맹인을 살린 시인 앙드레 부르통의 실화이고, 「저녁을 부려놓고 가다」 역시 허수경이나 최정례 시인이나 황현산 평론가 등을 추모했다.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던/ 시인 허수경 가고/ 속수무책이 당신이 세운 유일한 대책이라던/ 시인 황병승 가고/ 빈빈(彬彬)의 빛그물로 누워 떠내려가고 싶다던/ 시인 최정례 가고/…시인을 슬프게 하지 않고 아프게 하던/ 비평가 황현산 가고”(「저녁을 부려놓고 가다」 부문)
시 속의 추모 글들은 모두 각 시인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그만큼 시를 열심히 찾아 읽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를 쓰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는 그에게 거명된 시인이나 일부 시구의 의미를 묻자 사연이 조금 비어져 나온다.
“허수경이나 최정례는 자기만의 시 세계가 있었어요. 허수경 시인은 독일에 가기 전에는 자주 만났지만, 독일로 떠난 뒤에는 거의 만나지 못했지요. 한국에 한 번 나왔을 때 그때 봤어요. 최정례 시인이 죽기 얼마 전, 그와 통화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 희귀병이어요.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정례야, 좋은 시인은 오래 살아야 한다, 잘 몸 건사하고 꽃피는 시절에 보자. 그랬는데 갑자기 나빠져 숨지고 말았어요. 아끼던 시인들이었습니다.(비평가 황현산은 시인을 슬프게 하지 않고 아프게 한다고 했는데, 이건 무슨 뜻인가요) 비평이 자존심만 상하게 하거나 무시하거나 그러면 슬픕니다. 시인을 슬프게 하면 진정한 비평가가 못되지요. 반면 아프게 하는 것은 시인을 각성시킵니다. 아 내가 여기서 부족했구나, 하고 자각을 하게 되지요. 좋은 자극을 했다는 의미죠. 그는 진정한 비평가였습니다.”
시인은 시 「들여다본다」에선 자신의 50여년 시력을 회고하기도 한다. “들여다보니/ 내가 독무를 춘 지도 오십년이 되었다/ 놀라서/ 오십년의 시력을 들추어본다/ 말을 벼려 시에 이르는/ 시인 노릇 하기 혹독하다”(「들여다본다」 부문)
“큰 틀의 시관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시기나 시집으로 시기를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젊은 날에는 성공, 욕망 등에 대한 열망이 있어 자꾸 높은 것을 바라보고 산에 대해 썼던 것 같아요. 인생에 대해 알 만한 나이에는 물을 좋아했고요. 물은 순리대로 아래로 내려가지요. 지금은 나이가 들어 경계가 없고 한계를 짓지 않는 들이나 바다, 하늘 등을 노래합니다.”
등단이 반세기를 훌쩍 넘은 시인에게 무엇이 그렇게 혹독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어 물었다.
“늘 긴장해야 살아야 하고, 새로운 발견해야 하며, 나그네처럼 떠돌아야 합니다. (시인이 여유를 가지면 안됩니까) 시인은 여유를 가지면, 너무 느슨하면 안됩니다. 눈은 구경꾼이 되고, 발은 나그네가 돼야 하죠. 낯선 곳, 새로운 곳을 찾아야 해요. 한자리에 있으면 안됩니다. 시가 잘 안되면 밖에 나가야 해요. 저는 산책을 좋아합니다. 산책도 백 미터 다르고, 이백 미터 다르고 늘 새롭습니다.”
시 속의 “겨울이 혹독하면 나이테가 많아진다”는 구절을 설명하다가 좋은 시를 위한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말하기도 했다.
“사람도 시를 쓰려고 날을 벼리고 혹독해지면 성찰이 많아집니다. 자연히 시를 보는 세계도 넓어지고 성찰도 깊어져서 좋은 시가 되지요. 시를 잘 쓰려면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찢어버려야 합니다.(왜 찢어버려야 하나요) 쓰고 지워버리고 자꾸 다시 쓰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제대로 던져야 하지요.”
기자가 시집 마지막 페이지의 「시인의 말」 “머리에서 가슴까지/ 참 먼 길이었다/ 그 길이 나를 견디게 했다”를 읽어주자, 시인은 “제일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길이다. 그것이 시의 길”이라고 부연했다. 이어서 요즘 젊은 시인들은 어떤가라고 묻자, 시인은 우뚝한 시 정신을 강조하면서 이야기보따리를 조금 풀어놓는데.
“요즘 젊은 시인 가운데 잘 쓰는 시인들은 잘 쓰지만, 어떤 시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너무 길어요. 독특하면 모르겠지만, 그런 시를 쓰지 않으면 좋겠어요. 시대가 사람들을 급변하고 급박하게 만들지만, 시인은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정신까지 변하면 안됩니다. 시는 우뚝 하니 있어야 합니다. 누가 잘 썼다고 하고 평론가들이 잘 쓴다고 하면, 너도 나도 따라가기도 합니다. 유행 따라서 성형수술을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물론 유행을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무조건 따라가서야 되겠습니까. 오래가지 못합니다.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어야 해요. 시인들은 각자 항성이 돼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나이 든 사람을 고루하다고 할지는 몰라도, 젊어도 늙은 시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유배 보내야 합니다.”(2021.5.4)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천양희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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