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범 성범죄자 41%는 앞선 판결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최윤아 2021. 5. 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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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유예는 가해자가 충분히 반성해 굳이 사회로부터 격리하지 않아도 재범 위험이 낮다고 판단될 때 예외적으로 형의 집행을 유예하는 제도다.

그러나 법원이 성범죄 피고인에 대해 집행유예를 관행적으로 선고하면서 재범 억제라는 형벌 본연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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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중심 집행유예 남발..처벌 무력화 우려
게티이미지뱅크
#1. 66살 ㄱ씨는 지난해 8월 부산행 케이티엑스(KTX) 열차에서 옆 자리에 앉은 미성년자 몸을 강제로 접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사건 당시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던 ㄱ씨는 피해자가 찍은 범행사진을 들이밀자 그제야 혐의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사진을 보고서야 범행을 인정하는 등 엄하게 처벌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피고인이 반성하고 있고, 피해자와 합의를 했다”는 점을 들어 징역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2. 지난달 20대 지적장애인 승객을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택시기사 ㄴ씨에게도 징역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ㄴ씨는 택시에서 내린 피해자의 집으로 쫓아가 강제추행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장애인이라는 점을 알고 집까지 따라가 범행을 저질렀다”면서도 “(피고인이) 반성하고, 피해자와도 원만히 합의했다”고 집행유예를 선고한 이유를 밝헜다. 대법원 양형기준에는 미성년·장애인 대상 성범죄의 경우 가중처벌하라는 지침이 있으나, 실제 양형은 일반인 대상 성범죄처럼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집행유예는 가해자가 충분히 반성해 굳이 사회로부터 격리하지 않아도 재범 위험이 낮다고 판단될 때 예외적으로 형의 집행을 유예하는 제도다. 그러나 법원이 성범죄 피고인에 대해 집행유예를 관행적으로 선고하면서 재범 억제라는 형벌 본연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달 펴낸 ‘형사정책연구‘(125호)에는 가해자 관점에서 이뤄지는 법원의 기계 ·관행적 집행유예가 성범죄 처벌과 예방에 별다른 효과가 없음을 보여주는 논문(‘성범죄의 구조적 특성에 따른 집행유예의 실효성과 한계’, 최호진 단국대 교수·백소연 독일 오스나브뤼크대 박사과정)이 실렸다.

대법원 사법연감(2020)과 법무부 성범죄백서(2020) 통계를 보면, 2008~2018년 성범죄로 신상이 등록된 7만4956명 가운데 2901명(3.9%)이 다시 성범죄를 저질러 신상정보가 재등록됐다. 이들 재등록 성범죄자 10명 중 6명(62.4%, 1811명)은 1차 범죄 뒤 3년 안에 성범죄를 다시 저질렀다. 10명 중 4명(41.4%, 1201명)은 앞선 성범죄 재판에서 집행유예가, 10명 중 3명(32.4%, 941명)은 벌금형이 선고됐다. 재범자 10명 중 7명(73.8%, 2142명)이 1차 성범죄에서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와 벌금형 등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받은 것이다. 연구자들은 “집행유예 선고 판단 기준으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소는 재범 위험성이다. 성범죄는 재범 위험성이 높은 범죄인데 재등록사건 비율이 해를 거듭해 지속적으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집행유예 선고는 재범 위험성을 낮추기 위한 적절한 형사제재로 보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성범죄 재판에서 집행유예 선고 비율은 줄지 않고 있다. 2008~2018년 신상등록사건 7만4956건 가운데 집행유예가 3만1006건(41.4%)으로 가장 많았고 벌금 2만2669건(30.2%), 징역 1만9567건(26.1%) 순이었다. 집행유예 비율은 해마다 30~40%대를 유지하고 있다. 논문은 디지털 성범죄 1심 재판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된 비율이 2015년 27.7%에서 지난해 48.9%(6월 기준)로 21.2%포인트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집행유예는 범죄자에 대한 관용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를 다른 범죄에 비해 피해자 보호가 취약한 성범죄에 적용하는 것은 형벌이 오히려 가해자를 배려하는 모순을 야기하게 된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대법원은 디지털 성범죄 양형을 크게 강화했다. 하지만 일선 판사들이 기존 판례에 따른 관행적 양형을 벗어나지 않으면 처벌 실효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연구자들은 지적한다. “법정형이 과도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법관이 더 많은 감경사유를 적용해 실제로는 법정형 상향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는 3월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엔번방 첫 개설자 문형욱(갓갓) 1심 선고를 앞두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

연구자들은 “성범죄는 인간 존엄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다른 범죄보다 피해자 보호가 특히 더 중요하다. 그런데도 가해자(의 사회 복귀)에 초점을 맞춘 집행유예를 이토록 빈번하게 선고하는 것은 문제다. 집행유예를 예외적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선고하게 되면 범죄자뿐 아니라 일반시민도 집행유예를 처벌로 받아들이지 않게 돼 처벌의 확실성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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