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속 한줄기 빛에 반사된 하얀 물체..백제 최고의 명품구두였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이건 제사를 지냈던 흔적 같은데….” 2009년 9월 어느 날 전북 고창 봉덕리 고분을 발굴 중이던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단이 1호분의 정상부에서 심상치 않은 유구를 확인했다.
봉덕리 고분은 자연구릉을 깎아 시차를 두고 여러 기의 무덤을 조성한 이른바 분구묘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활약한 지방세력의 선산이라 할 수 있다. 이에 고창군은 2008년부터 3억원의 예산을 들여 봉덕리 1호분의 정비보존 방안을 마련하려고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1호분 분구 내 1·2호 석실에서 중국제 청자편과 금동제 귀고리 등을 찾아냈다. 학술적으로 의미있는 성과였다. 그러나 뭔가 2% 부족한 느낌이었다.
■밀봉된 고분에서 출현한 금동신발
이에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팀이 추가조사를 벌였고, 급기야 1호분의 정상부의 남동쪽에서 기존과 다른 형태의 유구를 찾아낸 것이다. 발굴단은 처음에는 직사각형 형태로 정연하게 깔려있는 깬돌(할석)을 제사 유구로 판단했다. 백제인들이 무덤을 조성한 뒤에 이 평평한 돌 위에서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린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깬돌을 들어내자 2장의 대형 판석을 이용한 덮개돌이 노출됐다.
이 덮개돌 사이의 빈틈은 4개의 작은 돌과 진흙으로 완전히 밀봉되어 있었다.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이것은 제사유구가 아니라 도굴의 화를 입지 않은 싱싱한 고분이었다.
“자!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발굴단을 이끈 당시 최완규 연구소장(현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덮개돌 한 장을 살짝 들어올렸다. 살짝 틈이 생겼다. 최소장은 틈 사이로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넣어 연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까맣게 찍혔지만 돌 틈 사이로 들어간 한줄기 희미한 빛이 어떤 물체에 부딪혀 흰색을 띄고 있었다.
최완규 소장이 발굴 실무자인 이문형 책임조사원(현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 연구교수)을 불러 흥분을 가라앉힌 채 나지막히 말했다.
“저건, 금동제품이 틀림없어. 금동신발 같은데.”
발굴단으로서는 무덤뚜껑을 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꾹 참았다. 자칫 덮개돌을 열었다가는 1500년 이상 밀봉되어 있던 유물들이 외부 환경에 노출되어 급격하게 훼손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유물의 보존처리는 국가기관인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몫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고분의 뚜껑돌을 닫고, 당시 이건무 문화재청장에게 ‘금동신발이 포함된 도굴없는 고분의 발견’ 사실을 알렸습니다.”(최완규 소장)
■신발 안에는 사람의 발뼈가…
12월까지 계속된 발굴 결과는 놀라웠다. 금동신발은 물론이고, 피장자의 주변에서 ‘죽엽형(대나무잎 모양) 머리장신구’와 ‘청동탁잔(잔을 받치는 접시모양 그릇)’, ‘장식대도(장식이 있는 큰칼)’, ‘중국청자항아리’, ‘소호장식유공광구호(작은 항아리를 장식으로 붙인 넓은 입 구멍 단지)’, ‘성시구(화살통)’ 등이 쏟아져 나왔다.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5세기 2/4분기 말~3/4분기로 추정됐다. 즉 450~475년 사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고분의 가치를 높인 것은 뭐니뭐니해도 금동신발이었다.
사실 확인된 금동신발의 크기는 32.4(좌)~32.7(우)㎝ 정도였다. 게다가 바닥판에 최대 1.7㎝ 크기의 원추형 스파이크를 18개나 박았다. 따라서 실용성은 ‘제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금동신발의 오른쪽 신발 내부에서 직물과 함께 극히 일부지만 주인공의 뼈가 확인됐다. 피장자의 발에 이 금동신발을 신겨서 안장한 것이 틀림없다.
금동신발은 바닥판과 양 옆판을 포함해서 3장의 금속판을 접어 못으로 결구하여 제작했다. 백제 고분에서 확인되는 다른 금동신발과 달리 윗부분에 2㎝ 가량의 목깃을 추가로 붙였다. 이 목깃은 결구한 금동판이 밖으로 벌어지지 않게 붙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총 4장의 금속판이 소요됐다.
■‘명품 중 명품’인 한성백제 구두
이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을 자세히 바라보면 탄성이 절로 터진다. 목깃을 제외한 양쪽 옆판과 바닥판에 다양한 문양이 배치되어 있다.
양쪽 옆면은 하트 모양의 불꽃무늬를 배치했다. 가운데 육각형의 틀을 만들어 그 안에 봉황·용·인면조(사람얼굴의 새)·쌍조·길상조 등을 역동적·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육각 무늬 바깥쪽으로는 상서로운 짐승을 알맞게 배치했다. 구획 내부의 빈 공간에는 직경 2~4㎜ 내외의 사람 얼굴을 원형으로 표현했다.
바닥판도 마찬가지다. 바깥쪽에 불꽃무늬를 두고 앞코부터 귀신얼굴-쌍조-용(가운데)-쌍조-역사상의 순으로 배치했다. 특히 바닥판의 용무늬는 곧게 선 뿔에 날카로운 눈, 화염을 뿜는 듯 벌린 입과 역동적인 몸체는 물론이고, 내부 비늘까지도 정(끌)을 이용해서 매우 섬세하면서 입체감있게 표현했다.
18개나 박은 스파이크는 직경 2.0㎜ 내외의 꽃잎(6엽) 중앙에 원추형 형태로 배치했다. 이밖에도 원형의 인면(사람얼굴) 문양 역시 바닥판 곳곳에 익살스럽게 표현해놓았다.
물론 백제시대 금동신발은 지금까지 13곳에서 총 20여점이 출토됐다. 기존 제품 중에도 凸자문과 능형문(마름모 무늬) 같은 단순 무늬에서 벗어나 거치문(톱니무늬), 화염문, 용문 등도 더러 보인다.
그러나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은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평을 듣는다. 즉 정(끌)을 이용하여 다양한 기법으로 구획을 만들어 그 내부에 다채로운 문양을 생동감있고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즉 뾰족한 정(끌)으로 점을 연속 찍는 ‘점선조 기법’에서 5세기 초중반에 이르면 정(끌)을 비스듬히 세워 각을 이루면서 공을 툭툭 차듯이(축·蹴) 연속으로 새기는(조·彫) ‘축조기법’으로 발전한다.
이 기법을 쓰면 쐐기형의 삼각형 점들이 연결되는 선으로 보인다. 당연히 입체감과 생동감이 생긴다. 기존의 점선조 기법은 문양대의 구획선이나 경계선 같은 보조 문양을 새기는데 활용된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점점 다양해진 공예기법이 봉덕리 금동신발에 와서 절정을 이뤘음을 알 수 있다”고 평가한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 유적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면서 “일본 고분에서 유사한 형태의 신발이 출토된 사례가 있지만 이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전했다.
■경주 식리총에서 발견된 백제의 명품구두
이문형 연구교수는 “이미 한성백제 시기에 이렇듯 정교하고 화려한 무늬를 새길 수 있는 기술자(공인) 집단이 존재했다는 얘기”라고 분석했다.
또하나 한가지 의미있는 시사점이 있다. 봉덕리 금동신발이 경주 식리총 출토 ‘금동신발’과 제작기법 및 문양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신발 양쪽의 판을 하나씩 제작해서 결합시키는 제작기법은 완전히 백제식이다. 이한상·이문형 교수는 “육각형 구획 안에 괴수와 인면조 등 무늬의 구성도 비슷하다”면서 “백제가 신라에 보낸 선물일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한상 교수에 따르면 식리총은 5세기 4/4분기, 즉 475~500년 사이에 조성된 무덤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신라인들은 금속공예기술의 꽃을 피운 백제의 명품신발에 열광하지 않았을까.
■중국을 괴롭힌 전성기 백제
도굴되지 않은채 현현한 이 고분에는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렇다면 15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 고분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금동신발과 같은 유물을 백제 중앙정부가 봉덕리 근방을 다스리던 지방세력의 수장에게 하사한 것으로 판단한다.
주지하다시피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룬 나라는 백제이다. 특히 근초고왕(재위 346~375)은 태자(근구수왕·375~384)와 함께 고구려군을 대파하고(369년) 황제를 의미하는 황색깃발을 휘날리며 대대적인 열병식을 열었다. 2년 뒤(371년)에는 급기야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 원정에 나서 고구려 고국원왕(331~371)까지 죽였다. <송서>와 <양직공도> 등 중국 사서에 ‘요서경략’ 기사가 등장하고 <양서>에는 “요서에 근거를 둔 백제가 근구수왕, 전지왕(405~420), 비유왕(427~455)이 백성을 파견했다”는 대목까지 보인다.
이 기록을 부인하는 학자들도 많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최치원(857~?)이 당나라 문하시중(태사)에게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었다”면서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했고, 북으로는 연·제·노의 지역을 어지럽혔다”(<삼국사기>)는 편지를 보냈다. 백제가 중국을 괴롭힐만큼 강성했다는 얘기다.
369년(근초고왕 24년) 무렵에는 왜왕에 칠지도를 하사했으며, 박사 고흥을 시켜 역사서 <서기(書記)>를 편찬하도록 했다.
■지방분권을 추구한 백제
주지하다시피 백제는 마한의 50여개 소국을 통합해서 세운 왕국이다. 태생부터 중앙집권보다는 지방분권을 지향한 왕국임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396년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치고 58성, 700촌을 빼앗았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은 백제가 성(城)과 촌 단위로 조직되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백제는 광개토대왕의 침략 이후 국세가 위축됐다. 하지만 한성 함락-웅진(공주) 천도(475년)까지는 여전히 전성기의 문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 백제 중앙정부는 지방 소재 거점 지역을 대대로 다스리고 있던 유력자에게 이른바 ‘위세품’을 사여한 것이다. ‘위세품’은 지방세력 수장의 위신을 세워주면서 한편으로는 중앙 정부의 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하사하는 귀중품을 의미한다. 백제 중앙정부는 이 위세품을 적절히 활용하여 지방 세력의 이탈을 막는 한편 그들을 매개로 거점 지역을 간접 지배했다. 지방 유력자들은 물론 기득권을 일부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인정을 받고 나름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했을 것이다.
■조잡한 무덤에 웬 금동신발?
이한상 교수는 “위세품의 사여는 왕실의 복속의례 혹은 충성서약의 형태로 표현됐다”고 해석한다. 그중에서도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이 최고급이었다.
“머리에 쓰는 관모는 관직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었죠. 또한 신발은 실용품이 아니지만 사후세계와 관련된 장송의례의 전용품이죠. 백제 중앙정부와의 강한 유대감을 말해주는 상징물이었겠죠.”(이한상 교수)
이문형 연구교수는 “그 중에서도 명품 중의 명품을 하사받은 봉덕리 고분 주인공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하나의 시사점이 있다. 백제산인 금동신발 외에 왜와 중국제 제품이 한꺼번에 안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이곳에서는 일본제 스에키(須惠器)인 ‘소호장식유공광구호’와 ‘기대형 고배(그릇받침형 굽다리접시)’, 그리고 중국제 청자가 완형으로 출토됐다. 스에키는 5세기 후반 일본 고훈(古墳) 시대에 제작된 도질토기이다. 봉덕리 출토 중국 청자는 동진(317~420) 혹은 유송(420∼479) 시기에 만든 자기이다. 고분 주인공은 백제-왜-중국 제품을 모두 소유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최완규 이사장은 “물론 백제 중앙정부가 보유하고 있던 왜나 중국제 제품을 배당 받았을 수도 있다”면서도 “그러나 봉덕리 고분 주인공이 무역 등 통해 마련한 것일 수도 있다”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주목할만한 사항이 또 있다. 이 4호 석실이 매우 화급하게 축조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1호분 분구 내에는 5기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중 이 (금동신발이 출토된) 4호 석실은 무덤방의 석재나 축조기법 등을 비교할 때 매우 조잡하고 거칠어서 급조된 것 같아요.”(이문형 연구교수)
즉 벽에 사용된 석재가 정연하지도 않고 크기도 천차만별이며, 벽석과 벽석 사이를 메운 작은 깬돌들도 대충 채워 넣었다는 인상이 짙다. 조금만 손을 대도 금방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있다. 이 무덤이 부부합장묘가 아니라 홀로 묻힌 단장이라는 것이다. 무덤 주인공이 미혼 남성일 수 있다는 얘기다.
무엇을 시사하는 대목일까. 이문형 연구교수는 여기서 고고학적인 상상력을 동원한다. 한성이 475년(개로왕 21년)에 함락됐고, 이 무덤이 조성된 때가 5세기 중후반(450~475년)이라는 점이 눈에 밟힌다.
그렇다면 한성기 말 고구려 광개토대왕 이후 격심해진 고구려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인물이 전사한 뒤에 급하게 만든 무덤이 아닐까. 그렇게 죽은 봉덕리 출신의 젊은 장수를 위해 백제 국왕(개로왕?)이 최고의 장례품인 명품 신발을 하사한 것이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한성백제 멸망과 금동신발 기술의 단절
화려한 금동신발은 한성 함락과 웅진천도(475년)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 지방 세력에 내려준 금동신발(익산 입점리·나주 신촌리 9호 을관) 등은 봉덕리 출토품과 사뭇 다르다. 화려하고 섬세한 제작기법 대신 점을 연속으로 찍어 선을 나타내는 ‘점선조 기법’으로 회귀한다.
이한상·이문형 두 교수는 “이것은 고구려의 침입과 웅진천도 이후 금속기술이 단절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랬을 것이다. 한성백제 시기(기원전 18~기원후 475년)에 전성기를 이룬 백제는 고구려 침입과 개로왕의 전사, 그리고 웅진 천도라는 미증유의 위기에 봉착했고, 국력 또한 급전직하했다.
금속기술 역시 단절되었다가 40여년이 지난 6세기 전반기에 겨우 회복되었다. 523년에 조성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과 왕비의 금동신발이 그것이다. 이 두 짝의 금동신발은 봉덕리 출토품과는 사뭇 다르다. 금속판을 오리고 뚫어서 무늬를 만드는 이른바 ‘투조기법’을 사용한 것은 같다. 그러나 기법도, 문양도 정제되고 세련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물론 이한상 교수는 “이것이 우열의 차이는 아니”라고 말한다.
“무령왕릉 출토 금동신발들은 신발 안쪽에 금속판, 즉 은판(무령왕)과 금동판(왕비)을 덧대었습니다. 그래서 무령왕의 신발은 배경은 하얀색, 무늬는 금색이 나게 돼죠.”
말하자면 제작기법과 문양 새김의 차이일 뿐이며, 이는 한성 시기와 웅진 천도 이후의 트렌드가 바뀌었음을 알려주는 단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됐든 백제의 명품 신발이 한성 함락 이후에 사라졌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호석실 도굴이 없었다면…
최근 문화재청은 이 고창 봉덕리와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 등 2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사실 삼국시대 고분의 출토 유물 중에서 귀걸이·목걸이·팔찌 등은 국보나 보물로 상당수 지정됐다. 그러나 금동신발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심지어 무령왕릉 출토 왕과 왕비의 금동신발 조차 지정문화재가 아니다.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5세기 중후반 한성 백제가 제작한 명품 신발(‘봉덕리 고분 출토품’)이 ‘보물’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이 있다. ‘보물 금동신발’이 출토된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보다 먼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5호 석실에서도 금동신발의 바닥편과 금동허리띠 꾸미개, 철도끼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는 것이다.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은 “출토된 철도끼 등을 보면 완형의 금동신발이 나온 4호 석실의 철도끼보다 컸다”면서 “5호 석실의 주인공이 4호 피장자보다 시기도 앞섰고 지위도 높았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고 추정한다. 아마 5호 석실과 4호 석실의 주인공들은 같은 가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5호 석실은 철저하게 도굴된 상태였다. 만약 도굴의 화를 입지 않았다면 한성백제 시대의 찬란한 금동신발, 아니 그보다 더 나은 금동제 유물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한가지 의문이 든다.
누군가 그렇게 도굴해간 5호석실의 금동신발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참고자료>
이문형, 유수화, ‘분석 및 조사보고문:고창 봉덕리1호분 출토 금동신발의 제작방법과 문양 -4호석실 출토품을 중심으로’, <마한백제문화> 25권,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15
이문형, ‘고창 봉덕리고분군 축조세력 연구’, 공주대 박사논문, 2020
이한상, <장신구 사여체제로 본 백제의 지방지배>, 서경문화사, 2009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 <고창 봉덕리 1호분 종합보고서>(유적조사보고 제80집), 2016
권향아, ‘삼국시대 금속유물의 선조기법양상-축조기법을 중심으로’, <문물연구> 제4호, 동아시아문물연구 학술재단, 2000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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