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에는 없는 판결문 속 법률용어, 공부해서 전하죠"

전현진 기자 2021. 5. 3.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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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수어통역사'

[경향신문]

신문철 수어통역사가 지난달 29일 대법원 제2소법정 합의실에서 스크린으로 전원합의체 선고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기배포된 재판 설명자료(위 사진)를 참고해 선고를 수어로 통역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분묘기지권 같은 경우
‘묘지를 가질 권리’로 해석
직접 표현 만들어 설명
판결문 미리 알 수 없어…
안내문 등 보고 통역 준비”

지난달 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2부(재판장 박노수) 심리로 진행된 한 재판은 전모 수어통역사의 선서로 시작됐다.

“양심에 따라 성실히 통역하고 거짓이 있으면 허위 통역의 벌을 받겠습니다.”

전 통역사는 피고인석에 있는 서모씨를 향해 바쁘게 손짓했다. 그는 두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키며 증거 조사에 대해 통역했다. 재판장은 통역의 속도를 감안해 천천히 말했다. 피고인 서씨는 듣거나 말하지 못하는 청각·언어장애인이다.

서씨는 재판을 마친 뒤 인터뷰를 요청하자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아 조심스럽다”고 했다.

권리와 절차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재판에선 서씨 같은 청각장애인에게 수어통역의 의미가 더 중요해진다.

신문철 수어통역사가 지난달 29일 대법원 제2소법정 합의실에서 각종 법률 용어의 수어통역을 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서씨 측 왕미양 변호사는 “청각장애인의 변호를 맡은 것이 처음인데, 상의할 게 있어 무심코 전화를 들어 (서씨와 곧바로) 통화하려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라며 “그동안 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을 깨닫지 못했는데 재판이라는 중요한 과정에서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서씨가 재판을 받기 위해 꼭 필요한 수어통역 비용은 국가에서 부담한다. 대법원은 지난해 청각·언어장애인 수어통역 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하도록 민형사 소송규칙을 개정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재판에서 정당한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지난달 29일 오후 대법원 제2소법정 합의실에 대형 TV 모니터와 소형 카메라 1대가 설치됐다.

30년 경력의 신문철 수어통역사가 카메라 맞은편에 앉았다. 제2소법정 옆 대법정에선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가 예정돼 있었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대법정에 들어서고, 선고가 시작됐다. 유튜브로 생중계되는 선고 화면 아래쪽에 신 통역사의 모습이 나왔다. 그는 전원합의체 선고를 수어로 실시간 통역했다.

이날 전원합의체는 관습법상 20년간 남의 땅에 묘지를 설치·점유해 시효 취득한 분묘기지권(남의 땅에 묘를 사용할 권리)이 있더라도 땅 주인이 토지 사용료를 청구하면 이를 지급해야 한다며 기존 판례를 변경했다. 여러 번 듣고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수어로 나타내기 위해 신 통역사는 묘지를 표현하기 위해 자주 손을 바삐 움직여 봉긋한 모양을 만들었다.

대법원이 수어 동시통역을 제공하는 건 2016년부터다. 신 통역사는 그때부터 이 일을 맡았다.

그는 선고 결과를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에 대법원이 사전에 배포하는 ‘주요 재판 안내’ 자료를 참고한다. ‘분묘기지권’ 같은 법률 용어는 수어로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을 직접 만든다.

신 통역사는 이날 분묘기지권을 ‘묘지를 가질(사용할) 권리’로 표현했다.

신 통역사는 “청각장애인은 한국어 음성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에 한국어도 외국어처럼 낯설어서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며 “청각장애인들에겐 수어가 모국어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언어로 공식적인 내용을 아는 것은 기본적인 권리”라고 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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