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시선으로 '혐오의 서사'를 읽다

배문규 기자 2021. 5. 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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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앤씨재단, 제주 포도뮤지엄 개관전 '너와 내가 만든 세상'

[경향신문]

혐오가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서
대학살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한·중·일 작가 8인 작품 선보여
“공감과 화합의 메시지 나누길”
2층선 독일 작가 콜비츠와 만남
모성 등 주제로 판화 32점 전시

“그들의 농담 같은 사소한 이야기들이 깃털처럼 우리의 마음에 사뿐히 내려앉아 두려움과 불안의 씨앗을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 거짓말을 양분 삼아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난 그것은 오해라는 이름으로 끝내 우리를 조각조각 갈라놓습니다.”

벽에는 한가득 얼굴들이 있다. 막연하게 인종을, 나이를 짐작해 볼 수 있고, 생김새에 따라 성격도 떠올려본다. 하지만 어떠한 정보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맞을까. 편견과 오해의 시작이다. 성립 작가는 온라인에서 수집한 눈, 코, 입을 무작위로 조합해 인물 드로잉을 그려냈다. 실제로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사람인 셈이다. ‘익명의 초상들’이 타인과 우리 사이의 경계를 생각해보도록 한다.

구와쿠보 료타의 ‘LOST#13’은 기차가 만드는 그림자놀이로 깊은 생각을 이끌어낸다. 어두운 방 안 장난감 기차가 선로를 따라 천천히 돈다. 선로 주변 물건들이 기차의 조명을 통해 벽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도시의 풍경 같기도, 괴물 같기도 한 과장된 이미지들의 실체는 테이프, 빨래집게 등 일상 속 평범한 물건들이다. 각자의 기억과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른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성립의 ‘스치는 익명의 사람들’(사진 왼쪽)과 ‘익명의 장면들’은 타인과 우리의 경계를 생각해보도록 유도한다. 티앤씨재단 제공

티앤씨재단의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은 예술가의 시선으로 혐오를 성찰하고, 공감과 연대의 의미를 나누는 체험 전시이다. 혐오는 단순히 싫어하는 감정이 아니다. 성별·나이·국적·종교·장애·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향해 가해지는 폭력이다. 전시에선 이러한 혐오가 어떻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개인에서 군중으로 확대되어, 끝내 대학살까지 이어지는지를 서사적 흐름으로 구성했다.

지난해 말 서울 전시를 개편해 제주 포도뮤지엄 개관전으로 새롭게 구성했다. 기존 전시에 참여한 강애란, 권용주, 성립, 이용백, 최수진, 구와쿠보 료타에 장샤오강과 진기종이 합류해 한·중·일 작가 8인의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 작가들의 설치 작업 외에 재단에서 기획한 테마 공간도 주목할 만하다. 벽면의 구멍을 통해 혐오 발언들을 살펴보도록 한 ‘소문의 벽’, 사방이 거울로 된 공간에서 폭력의 이미지를 감각하도록 한 ‘패닉부스’ 등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해 볼 수 있다.

케테 콜비츠의 청동조각 ‘여인과 두 아이’는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 티앤씨재단 제공

포도뮤지엄 2층에선 ‘케테 콜비츠 - 아가, 봄이 왔다’도 함께 진행된다. 독일 표현주의 작가 콜비츠는 전쟁에서 아들과 손자를 모두 잃은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번 전시에선 노동과 빈곤, 전쟁과 죽음, 모성을 주제로 한 판화 원작 32점과 한국에 처음 전시되는 청동 조각 ‘여인과 두 아이’가 소개된다. 특히 비극과 절규의 모습 자체를 반전의 소재로 삼은 ‘전쟁’ 연작 7점은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 평화를 외친 콜비츠의 메시지를 오롯이 전한다.

김희영 티앤씨재단 대표는 “타인의 고통에 동화되어보는 경험이 공감의 핵심임을 깨닫고 전시를 구상하게 됐다”며 “관람객들이 혐오와 차별의 해악성을 돌아보고 공감과 화합의 메시지를 나눴으면 한다”고 말했다.

제주 여행을 온 가족 관람객이나 학생들이 볼만한 전시다. 포도뮤지엄 개관 기념으로 5월 말까지 무료 공개된다. 전시는 내년 3월까지.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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