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 문화강국 가는 '촉매'..'상속세 미술품 물납제' 꼭 도입해야
미술관 운영 살리는 일거양득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등
조선 회화 코너 '빈자리 채워'
샤갈·르누아르·고갱 작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도 체면 세워
'남에게 줄때는 좋은 것 주라'
격언대로 통 큰 기부 실천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의 질은 이미 미술계에서 정평이 나 있었는데 그 양이 무려 1만1000여 건에 2만3000여 점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보 제216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보물 제1393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를 소장하게 됨으로써 조선시대 회화실의 빈 공백을 메우게 되었고,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평론가들이 100년 뒤 보물로 지정될 작품으로 지목한 박수근의 대작 '절구질하는 여인'을 소장하게 됐다. 게다가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을 비롯해 피카소, 샤갈, 르누아르, 고갱, 달리 등 서양근대미술의 원화를 소장하는 체면을 세우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구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양구 박수근미술관,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등도 자기 지역을 대표하는 화가의 명작을 대대적으로 보완하게 되었으니 작품을 기증받은 미술관들은 로또에 수십, 아니 수백 번 당첨돼야 얻을 수 있는 횡재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할 판이다.
그런데 '이건희 컬렉션'이 이처럼 통 크게 국가에 기부되자 한편에서는 그 배경에 대해 여러 추측이 나오며 그 진심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있다. 모두 알다시피 삼성문화재단은 리움과 호암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만약에 이 미술품들이 삼성문화재단 소유로 되어 있었으면 애초부터 상속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건희 회장은 1만1000여 건의 미술품을 개인 명의로 소유했던 것인가.
그런데 명화 한 점에 1000억원이 넘는 서양 근현대미술품을 재단의 재력으로는 1년에 한 점도 구입할 수 없는 것이어서 개인의 사재를 털어 구입했던 것이다. 사실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이건희 컬렉션' 중 많은 작품들이 리움 개관식을 비롯한 특별전에 이미 전시된 바 있고 국보와 보물들은 미술사 도록에 대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으로 표기돼 있다. 만약에 이건희 회장이 살아계셨다면 이 작품들은 하나씩 순차적으로 삼성문화재단으로 이관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변을 당하여 졸지에 상속세 대상으로 되고 만 것이다.
비슷한 예가 한번 있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62년 불과 57세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상속세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유족들이 상속세를 내자면 간송 소장품의 반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자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이 당국에 호소해 미술문화재단을 세워 이관한다는 조건으로 상속 대상에서 면제받았고 결국은 2013년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이관했다.
이런 관례에 따르면 '이건희 컬렉션'도 삼성문화재단으로 이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정서법'상 간송은 그렇게 해도 되지만, 삼성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간 것이 프랑스의 상속세 물납제도다. 평가액의 반에 해당하는 작품을 국가가 가져가는 것이다. 이 물납제도로 피카소 사후 파리에 피카소미술관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상속세 물납제도 도입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라 미술계는 이 법이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이 경우도 '이건희 컬렉션'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에 유족과 삼성 측에서는 상속세법을 떠나 이건희 회장의 미술문화에 대한 사랑과 사회봉사 정신을 살려 국가에 기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기부하되 '남에게 줄 때는 좋은 것을 주라'는 격언대로 국보 14점과 보물 46점까지 기부했다. 사실 국보와 보물은 상속세 면세 대상이기 때문에 신고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이번 기부에 조건이 있었다면 지방 미술관에 작품을 미리 배정해 준 것이다. 이는 삼성이 우리나라 지방 미술관의 실태가 얼마나 열악한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려준 선처라고 생각한다.
대구미술관에는 대구의 화가 이인성의 명작 '석고상이 있는 풍경'이 돌아갔고, 광주시립미술관에는 김환기의 작품 3점과 오지호, 임직순의 작품이 기증되었다. 또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에는 이중섭의 제주도 시절을 증언하는 '섶섬이 있는 풍경'이 기증되었고, 지난달에 개관한 전남도립미술관은 이 지역 출신인 천경자의 '만선' 등 21점을 소장하게 되었다. 모르긴 해도 이런 일은 앞으로 100년 내로는 다시 없을 것이다.
이에 나는 이건희 회장의 미술문화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높은 안목에 깊은 존경을 보내며 이 소장품을 국가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지방 미술관까지 배려해 기부한 유족과 삼성 측에 미술계 일원으로서 심심한 감사를 올린다. 이제 우리는 이를 계기로 세간에 퍼져 있는 미술애호가에 대한 불편한 시각과 불필요한 편견을 씻어버리고 제2의 이건희 회장이 나올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애호가들이 성심으로 작품을 소장해 미술관을 세우는 것이 미술문화의 진정한 패트런으로 존경받는 일이며, 미처 재단까지 설립하지 못할 경우엔 상속세를 작품으로 받는 물납제도를 확립해 유족의 부담을 덜어주고 국가는 그것을 미술관 운영에 활용한다면 우리 미술계는 자못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이제 기증받은 박물관과 미술관은 모름지기 기증자에 대한 예우과 기증유물에 대한 명확한 표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18세기 금사리백자의 상징인 국보 제258호 '백자 청화죽문 각병'(청화백자 대나무 무늬 모깎기 병)은 더 이상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이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건희 컬렉션)'으로 표기해야 마땅할 것이다.
많은 관심 속에 온갖 억측과 의심의 시선이 있었지만 결국 '이건희 컬렉션'은 미술관 문화를 통해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을 이렇게 시범적으로 활짝 열어 보여주고 있으니 미술계로서는 경사도 이런 경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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