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대한항공 첫 태평양 횡단은 '화물기'였다
대한항공, 여객감소에도 '화물'덕에 영업흑자
1971년 화물기로 첫 태평양 하늘길 뚫어
동물, 예술품까지 운송..50년 화물 DNA
올해 1·4분기 인천공항을 거친 항공화물량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 78만6396t으로, 작년 같은 기간 66만4883t보다 18.3%나 늘었습니다. 2001년 개항 이후 1·4분기 최대 실적입니다. 코로나19 여파로 국제 여객 수요가 급감하자 대다수 항공사가 화물 운송에 집중한 덕분입니다. 최근 선박을 구하기 어려운 탓에 해상운송 물동량 일부도 항공운송으로 옮겨오고 있습니다.
특히 글로벌 항공사들이 잇따라 대규모 적자를 발표했던 지난해 대한항공은 영업 흑자를 유지했습니다. 화물운송 덕분이었습니다. 대한항공의 작년 매출은 7조4050억원으로 전년도 12조2917억원에 비해 40% 감소했습니다. 반면 영업이익은 2383억원을 기록해 2019년(2864억원) 대비 17% 감소하는 데 그쳤습니다. (순환휴직 등 경영정상화를 위해 고통분담에 나선준 직원들의 희생 덕분이기도 합니다.)
여객 매출은 전년 대비 74% 줄었는데, 화물 매출은 되레 66%나 증가했죠. 타 항공사와 달리 화물기 가동률을 높이고, 여객기를 개조해 화물 운송에 투입하는 등 적극적인 화물 운송 전략을 펼친 결과입니다.
114조 규모에 달하는 항공화물 시장
대형항공사의 항공기라고 하면 보통은 여객기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항공화물 운송 시장도 규모가 상당합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 따르면 2019년 전 세계 항공사의 화물 매출액은 약 114조원(1024억달러)에 달했습니다. 항공업계 전체 매출의 12% 정도입니다. 글로벌 항공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는 분야인 셈이죠.
대한항공 역시 일반 승객들에게는 여객기의 모습이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회사는 화물 운송의 역사가 깊습니다. 대한항공이 화물운송을 기반으로 코로나19가 불러온 보릿고개를 버텨내고 있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50년 전 대한항공이 힘겹게 취항한 미주노선에 처음 투입한 항공기가 바로 화물기였습니다.
신생 항공사 대한항공 "미주노선을 뚫어라"
한진그룹 창업주인 조중훈 회장은 1968년 적자투성이의 국영항공사인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합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20여개 국영기업 중 가장 큰 적자를 내는 골칫덩어리였다고 합니다. 정부가 민영화 방침을 세우고 여러 기업에 인수를 타진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조중훈 회장도 세 차례나 거절 의사를 밝혔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나고 난 뒤 인수를 결정합니다.
조 회장은 그간의 방만한 운영 방식을 개선하는 등 경영 혁신을 진행했습니다. 동시에 노선 확장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서울~포항 노선을 신설하는 등 국내 순환 노선망을 구축했고, 일본, 동남아 노선을 중심으로 국제선 확장에도 나섰습니다.
가장 큰 난관은 미주노선이었습니다. 미주노선은 국적항공사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반드시 취항해야 했지만 1957년 4월 맺은 한미항공협정이 걸림돌이었습니다. 한국 항공사는 알래스카를 경유해 시애틀까지 가는 북태평양 노선만 운항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승객이 가장 많은 호놀룰루나 로스앤젤레스 등 중부태평양 노선 운항은 막혀있었죠.
반면 미국은 어느 도시에서든 출발해 한국에 취항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1971년 화물기로 첫 태평양 횡단
조중훈 회장은 미국 정부와 끈질기게 협상했습니다. 1970년 11월 로스엔젤레스에 지점을 설치하고, 이어 뉴욕, 휴스턴에도 영업소도 열어 의지를 보여줬습니다. 결국 미국 정부는 1971년 중부 태평양노선 취항 허가를 내줍니다. 출범 2년 만에 태평양 하늘길을 열게 된 것이죠.
이때 그는 여객기가 아닌 화물기를 띄우기로 결심합니다. 서울~도쿄~로스앤젤레스를 잇는 노선이었죠. 당장은 여객 수요가 부족한 데다 화물 운송으로 안전과 서비스 품질을 검증할 시간을 벌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취항이 결정됐지만 당장 실을 화물이 부족했습니다. 한미 간 무역 규모가 크지 않은 탓이었습니다. 당시 주요 수출 품목인 가발을 싣고자 중소가발 업체와 바이어를 직접 찾아가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화물을 확보하게 됩니다.
1971년 4월 26일 오후 5시. 대한항공 KE801 화물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했습니다. 중간 기착지인 일본 하네다 공항에 잠시 착륙한 뒤 화물기는 태평양을 가로질러 12시간 4분 후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대한민국 국적기가 1만㎞가 넘는 태평양을 처음으로 건넌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美교민들 공항서 "대한민국 만세!"
미주노선 화물운송은 처음엔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곧 안정적인 수송 실적을 이어감에 따라 화주들의 신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미주노선 개설 1년이 지난 1972년 4월 도쿄를 경유하는 미주노선 화물편을 주 3회에서 주 2회로 줄이고, 서울~로스앤젤레스 화물 직항 4편을 신설해 한미 간 교역량 증가에 대비했습니다.
화물기 경험을 축적하며 여객기 운항을 준비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1972년 4월 19일. 김포공항에서 이륙한 대한항공 KE002편 B707 여객기가 하와이 호놀룰루를 거쳐 로스앤젤레스 공항 착륙에 성공합니다. 호놀룰루와 로스앤젤레스의 두 공항 모두 교민들이 나와 여객기가 착륙하자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태극마크가 새겨진 국적기의 등장은 그간의 설움을 씻어낸 자랑스런 장면이었습니다.
조중훈 회장은 프랑스 파리에 처음 취항할 때도 동일한 전략을 취합니다. 파리 노선에 화물기를 먼저 띄운 다음 여객기는 1년 후 투입했습니다. 그는 새 노선을 개척할 때마다 이 같은 원칙을 지켰습니다. 당시 다른 항공사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고 합니다.
대한항공의 50년 화물 DNA
대한항공은 특수 화물 분야에 몇 가지 진귀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1982년 일본 도쿄에서 쿠웨이트로 77t에 달하는 송유관 33개를 한꺼번에 수송해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1983년에는 살아있는 동물 418마리를 미국 댈러스에서 서울까지 수송했습니다. 서울대공원에서 지내게 될 동물들이었죠. 당시 '노아의 방주'라는 별칭까지 붙으며 화제가 됐다고 합니다.
이런 대한항공의 화물운송 DNA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4월 30일 대한항공은 '50년 역사의 대한항공 화물사업, 현대미술 거장 피카소를 담다'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습니다. 지난 4월 16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총 22t에 달하는 피카소 110여개 작품을 무사히 운송했습니다. 대한항공은 이미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예술품을 안전하게 수송한 바 있습니다. 적정 온도와 습도 조절이 절대적인 예술품 운송에도 전문성을 보유한 겁니다.
코로나19 백신 운송에도 국적항공사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작년 12월 8일 국내 생산 백신 원료를 영하 60℃ 이하의 상태 유지한 채 암스테르담까지 안전하게 수송했습니다. 올해 2월 24일 국내 생산 백신 완제품을 태국과 베트남으로 수송했고, 같은 달 26일 화이자 1호 국내 백신을 성공적으로 들여오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국제 여객수요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백신 도입으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지만, 일부 국가만의 집단 면역으로는 국제 여객 수요가 확대되기 어렵습니다. 당분간 항공화물로 버텨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아시아나항공 합병 등 제2의 도약을 준비 중인 대한항공이 화물 운송에서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대목입니다.
※ 이임광 작가의 저서 <정석 조중훈 이야기, 사업은 예술이다>를 참고했습니다.
eco@fnnews.com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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