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매치 첫승 후 메틸 알코올을 양주로 알고 자축, 0-12 참패
선수들 모르고 마셔 복통 나 대패
첫 한·일전 승리, 월드컵행 주역
명예의 전당 헌액된 축구사 증인
함흥 출신, 사전 30개 들고 월남
전차 잘못 타 서울대 대신 고대 가
[죽은 철인의 사회] 대표팀 1호 골키퍼 홍덕영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축구 대표팀 홍덕영 골키퍼가 망치로 축구화를 수선하고 있다. 함께 출전했던 선수들이 이 사진에 사인을 했다.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5/03/joongangsunday/20210503063422621lsmt.jpg)
스웨덴전 48개 슈팅에 멍투성이
![런던 올림픽 스웨덴전에서 분전하고 있는 홍덕영 골키퍼(가운데 넘어져 있는 선수).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5/03/joongangsunday/20210503063423151jfab.jpg)
서대문 하숙집에 살던 홍덕영은 동대문에 있던 약학전문(현 서울대 약대)에 입학하려고 했는데 전차를 잘못 타는 바람에 보성전문(현 고려대) 시험을 쳤다. 보성전문에 합격했지만 콘사이스 30권을 다 팔아먹는 바람에 하숙집에서 쫓겨날 상황이었다. “축구부에 들어가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선배의 말에 홍덕영은 무작정 축구부를 찾아간다. 주장 김용덕이 “포지션이 뭐냐”고 묻자 그는 “골키퍼”라고 대답했다. 조선 팔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선수들이 모인 보전에서 공격수로는 살아남기 힘들 것 같았고, 전차 안에서 보전 학생들이 “우리는 골키퍼가 약해서 문제”라고 얘기하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홍덕영은 보전의 수문장이 됐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선수카드.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5/03/joongangsunday/20210503063423527oycm.jpg)
첫 상대는 북중미 강호 멕시코. 한국은 불같은 투지와 체력을 앞세워 기선을 제압했고, 당황한 멕시코 선수들이 주춤주춤 물러서는 사이 잇따라 골을 터뜨렸다. 한국의 5-3 승리.
다음 상대인 스웨덴은 당시 대회 우승을 차지한 강호이긴 했지만 0-12는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참패의 이면에는 헛웃음이 나는 사연들이 숨어 있다. 다음은 이의재 선생이 쓴 『한국축구인물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입장권.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5/03/joongangsunday/20210503063423752cqyw.jpg)
또 다른 패인은 축구화였다. 스웨덴전이 열린 날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당시 한국 선수들이 신은 축구화는 두꺼운 가죽 신발 바닥에 ‘뽕’을 못으로 박아 만든 것이었다. 뽕이란 여러 겹의 가죽을 아교로 접합한 뒤 동그랗게 오려낸 ‘스터드’를 말한다. 빗물에 젖은 가죽 축구화는 납덩어리처럼 무거웠고 뽕은 다 닳아서 죽죽 미끄러졌다. 스웨덴 선수들은 방수 처리한 축구화에 여러 종류의 스터드를 경기장 조건에 맞게 갈아 끼웠다.
은퇴 후에 국제심판으로도 활약
![2001년 중앙일보와 인터뷰할 당시의 홍덕영 선생. [중앙포토]](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5/03/joongangsunday/20210503063423985revj.jpg)
스웨덴의 유효 슈팅은 48개였다고 한다. 그중 12개만 먹었으니 그만하면 선방했다고 할 수 있겠다.
광복 후 첫 한·일전은 1954년 3월에 열린 스위스 월드컵 극동지역 예선이었다. 한국과 일본이 홈앤드어웨이 경기를 펼쳐 승자가 본선에 진출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인을 대한민국 땅에 들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려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열렸다.
여기서 그 유명한 ‘현해탄’ 발언이 나온다. 이 대통령이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어라”고 했다는 건 요즘 말로 ‘가짜뉴스’다. 당시 축구협회장인 장택상 전 국무총리가 “지게 되면 현해탄을 건너오다가 모두 빠져서 고기밥이나 되라”고 했고, 출국인사 자리에서 다시 현해탄 얘기가 나왔다. 이유형 감독이 “각하. 만약 우리가 진다면 현해탄을 건너올 때 이 몸을 현해탄 바닷속에 던지겠습니다”고 말했다는 게 홍 선생의 증언이다.
홍 선생은 “우리 선수들 유니폼엔 백넘버를 달 만한 여유가 없었다. 대회 조직위원회에서 광목에다 등번호를 써준 것을 선수 각자가 바느질을 해 번호를 붙였다”고 회고했다. ‘현해탄 투혼’을 앞세운 한국은 1승1무(5-1, 2-2)로 일본을 누르고 첫 월드컵에 진출했다.
스위스 월드컵 개막일인 6월 16일 밤 9시에 한국 대표팀은 취리히에 도착했다. 미 공군 수송기를 탔는데 긴 널빤지로 만든 의자가 너무 높아서 발을 대롱대롱 흔드는 상태에서 48시간 비행기 여행을 했다는 것이다. 취리히에 도착했을 때 선수들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헝가리전 0-9, 터키전 0-7 참패가 한국의 첫 월드컵 도전사였다.
은퇴 후 국제심판으로도 활약한 홍덕영 선생은 2002 한·일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와 꿈같은 4강 신화를 맛본 뒤 2005년 9월 13일, 조용히 영면에 들었다.
■ 골키퍼 손가락, 대포알 슈팅 막느라 휘어져
![강한 슛을 막다가 손가락이 크게 휜 최상호 선생(위)과 김영광의 손. [중앙포토]](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5/03/joongangsunday/20210503063424097ouij.jpg)
20년 전 내가 취재한 1950년대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 최상호 선생은 오른손 검지손가락이 엄지 쪽으로 70도 정도, 왼손 검지도 60도 정도 휘어 있었다. 제대로 된 장갑도 없이 강한 슈팅을 막다 생긴 ‘산업재해’다.
최 선생은 “당시 골키퍼는 ‘시보리장갑’이라고 불린 군용 장갑을 꼈어요. 손가락이 아파도 경기에서 뺄까 봐 코치한테 말도 못했지. 아이스케키 막대기를 부목 삼아 붕대로 칭칭 감고 하룻밤을 잔 뒤 다음날 붕대를 풀면 원래대로 휘어져 있는 거야”라고 회고했다. 최 선생은 슛을 막을 때마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 아팠다고 했다.
K리그 최고참 골키퍼로 성남 FC의 골문을 지키는 김영광(37)도 왼손 약지가 휘어 있다. 중3 때 손가락 뼛조각이 떨어진 상태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계속 뛰는 바람에 휜 상태로 굳어져 반지를 낄 수도 없을 정도다. 프로축구 경기 때 김영광의 부모를 만난 적이 있다. 골키퍼는 몸도 아프지만 마음이 더 아픈 포지션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갑니까. 그런데도 영광이가 두 골만 먹으면 가족들 얼굴이 벌게집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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