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가 꿈꾸다 6·25 참상 겪으면서 '모두를 위한' 사제 길 선택

이혜인 기자·도재기 선임기자 2021. 4. 27.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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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추기경의 삶

[경향신문]

이웃과 함께… 한국 천주교의 원로 지도자인 정진석 추기경이 27일 선종했다. 정 추기경이 2012년 6월15일 명동대성당에서 이임 감사 미사를 봉헌한 후 신도들의 인사를 받으며 성당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한국 교회사를 이끈 산증인
2006년 장기·각막 기증 서약…저서·번역서 60권 달해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삶은 사목 표어처럼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되는 삶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돼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그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도록 하겠다’는 염원과 다짐의 실천이다. 27일 선종에 들기까지 세계 가톨릭의 기둥인 추기경으로서, 한국 천주교 원로 지도자로서, 봉사와 사랑을 전하는 사제로 살아왔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등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그는 한국 교회사를 이끈 산증인이기도 했다.

정 추기경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줬다. 은행 통장 잔액을 노숙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무료급식소 ‘명동밥집’과 장애인재활센터, 청소년 신앙교육 등을 위해 봉헌했다. 2006년에는 장기기증과 사후 각막기증을 서약하며 “나이로 인해 장기기증의 효과가 없다면 안구라도 기증해 연구용으로 활용해 주실 것”을 자필로 당부했다. 이날 선종과 함께 곧바로 안구적출 수술이 진행됐다.

건강 악화로 서울성모병원 입원 중에도 문안을 온 사제들에게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은데 빨리 그 고통을 벗어나도록 기도하자”고 손을 잡았다.

정 추기경은 1931년 서울의 친가와 외가 모두 4대째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 명동대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초등학생 시절 노기남 대주교 복사(신부의 미사 집전을 보좌하는 소년)를 매일 성실하게 해 상으로 십자가를 받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중앙고 시절에는 평소 “나를 키운 건 중앙고등학교 도서관이었다”(이 말은 모교 도서관 앞에 새겨져 있다)고 강조할 만큼 책벌레였다.

발명가를 꿈꾼 정 추기경은 서울대 화공과에 진학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삶과 죽음을 오가는 전쟁의 참상을 겪었다. 전쟁 직후 그는 대학 복학이 아니라 보육원을 찾는다. 전쟁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서다. 그러고는 1954년, 가톨릭대 신학과에 입학한다. 모두를 위해 봉사하는 사제의 길을 택한 것이다. 정 추기경은 2009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전쟁 중에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다”며 “(당시 살아남은 것은) 하느님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고 덤으로 주신 삶,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해 신학대학을 갔다”고 밝혔다.

정 추기경은 1961년 사제 서품을 받고 서울대교구 중림동본당 보좌신부와 성신고 교사로 일하다가 1968년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대학 대학원으로 유학, 교회법을 전공했다. 1970년에는 국내 최연소(39세) 주교가 됐으며, 이후 28년 동안 청주교구장을 지내며 주교회의 부의장·의장(1996~1999) 등을 역임했다. 1998년 4월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에, 2006년에는 마침내 한국의 두번째 추기경에 서임됐다. 2012년 서울대교구장을 은퇴한 뒤 가톨릭대 성신교정 주교관에서 집필활동을 하며 지내왔다.

교회법 전문가이자 일본어·라틴어에도 능통한 정 추기경은 사제 서품 이후 해마다 1권의 책을 펴냈다. 저서·번역서가 60권을 훌쩍 넘어선다. ‘1년에 1권의 책 출간’은 부제 시절 고 박도식 신부(전 대구가톨릭대 총장)와 “신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1년에 책 1권씩을 내자”고 한 약속을 평생 지킨 것이다. 주교 수품 50주년(금경축)을 맞은 지난해에도 번역서 개정판 <참신앙의 진리>를 출간했다. 모교인 중앙고 도서관에는 그의 특별 서가도 있다. 정 추기경은 지난해 “책 출간은 하느님께 달렸는데, 감사한 일은 매년 1권씩 낼 수 있었다는 것”이라며 “벌써 60권이 넘었어, 굉장한 은총”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가 편찬을 이끈 <교회법 해설> 전집은 동양 언어로 된 첫 가톨릭 라틴 교회법전 해설서로 교회 안팎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정 추기경은 대사회적 활동·발언과 관련해 정치·사회 현실에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한 김수환 추기경과 비교돼 교회 안팎에서 보수적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둘러싼 논란, 사제들의 박근혜 대통령 사퇴 촉구 시국미사와 관련한 발언들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일부 원로 사제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은 게 대표적이다. 천주교 관계자는 “개인적 성향과 더불어 교회와 성직자의 역할, 시대 상황의 변화 등도 영향을 미쳤다”며 “적극적인 대사회적 발언은 자제했지만 ‘더 인간답고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인권, 경제정의, 공동선 등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병문안을 온 사제들에게 정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또 전했다. “모든 이가 행복하길 바랍니다.”

이혜인 기자·도재기 선임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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